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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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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눈] 상식 혹은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정신의 현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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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에 재림한 천박한 민족주의 2008.08.30 13:25:48

조선총독부 청사를 집어삼킨 천박한 민족주의가 다시 망동을 부릴 태세다. 그들이 이르기를 현재의 서울시청사는 일제잔재라 한다. 잔재란 무엇이냐? 기름찌꺼기, 음식찌꺼기와 같은 기름 때 덕지덕지 묻은 찌꺼기를 일러 잔재(殘滓)라 한다. 그러니 서울시청사가 일제 잔재라 함은 일제가 남긴 쓸어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쓰레기 찌꺼기를 처리해야 할 난지도는 사라졌다.


저것이 일제 잔재인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세우는 근거는 오직 이에서 출발해 이로 귀복(歸復)한다.

그것을 세운 주체가 일제(日帝)라 한다.


그래서 어쨌다고?


같은 논리대로라면 유네스코 세계화유산이기도 한 석굴암도 쓸어버려야 한다.

왜냐? 우리가 아는 석굴암이 저 정도 모습을 갖추는 데는 ‘일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소위 한일합방이 되기 이전 석굴암은 처참한 몰골이라, 그것이 소위 동양미술을 대표하는 최고 미술품임을 발견한 이는 일본 사람이요, 그에 힘입어 그것을 대대적으로 재단장 수리한 주체는 조선총독부였다.


비단 석굴암뿐이랴? ‘일제’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하여 그것을 잔재라 하여 쓸어버리겠는가?


이 자리서 단언하거니와 서울시청사는 일제 잔재가 아니다. 태어날 때도, 태어나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시청사는 단 한번도 잔재인 적이 없다. 그것을 세우고자 한 주체가 설혹 일제라 한들, 아니, 조선총독부라 한들, 그것이 선 땅이 조선이요, 그것과 함께 호흡한 이들 또한 조선일지니, 함에도 그것을 설계한 이가 일본인이라 하여, 나아가 그것이 효율적이며 폭압적인 식민통치 일환으로 세운 근거지라 하여 그것이 지금은 잔재라는 소리로 일소에 부치며, 그리하여 이 지구상에서는 오직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 패거리들이라 할 만한 짓거리를 서울시가 저지른 폭거, 즉, 문화유산 파괴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각에는 인다.


그러면서 1995년 폭파 철거한 조선총독부를 거론하면서 그와 같은 반열에 시청사를 올려놓고는 그것이 잔재라 하여 그런 폭거와 야만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이 있다.


이르노니, 설혹 그것이 일제가 세운 것이라 하자. 그것이 선 때는 1926년이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는 장장 82년일지니, 그렇다면 설혹 일제 잔재라 하는 기간도 19년에 지나지 않거늘, 그 나머지 63년의 서울시청사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 청사는 대한민국 역사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을 그 중 가지 하나가 병이 들었다고 해서 둥치조차도 싹뚝 잘라버려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 중에는 정말로 난지도 쓰레기장으로 가야 할 소위 ‘日’자를 근거로 들거니와

그들이 이르기를 시청사는 평면도가 日이니 이는 일본을 상징한다 하니, 도대체 이처럼 단순하고 무식하며 천박한 주장은 그 근거와 뿌리가 어디인지를 나는 추적해 보고 싶노라. 그리하여 그가 만약 지금 죽고 없다면, 그를 부관참시하고 싶노라.


아무리 일제가 밉다 해서 이 따위로 역사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일제가 밉다 해서 그런 조작된 신화가 이미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 오래임에도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허무맹랑한 주장을 철거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행위는 더욱 경멸할 만하다.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치욕의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 하며, 그 유사한 사례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히로시마 원폭 돔을 들고 있으나, 말하노니 저 서울시청사는 치욕의 역사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무단 철거라는 포학을 저지른 서울시에서는 이르되 누누이 안전성을 강조하거니와,

이 또한 웃기는 얘기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함에도 그런 주장이 어느 정도는 효력을 발휘함인지,

정말로 그것이 위험하다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있다.


그 부당성은 다른 자리를 빌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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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을축년 대홍수 직후 풍납토성 탐방기 2006.09.25 11:40:53
*** 쥔장 注 : 2002년 7월30일 송고한 기사다.


< 을축년 대홍수 직후 풍납토성 탐방기 전문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25년 여름,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9월 25일 경기 광주 구천면(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을 탐방한 일본인 형질인류학자 아오노 켄지(淸野謙次)의 탐방기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이 글은 1926년 7월에 발간된 「민족」(民族. 민족발행소< 民族發行所 > 발행)이라는 잡지 제1권 제5호 160-161쪽에 걸쳐 '조선 경기도 구천면 풍납리 백제유적'(朝鮮京畿道九川面風納里の百濟遺跡)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까마득히 잊혀진 존재였던 풍납토성이 20세기 일본 식민치하에서 어떻게 '발견'됐는지,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다.

= 조선 경기도 구천면 풍납리 백제유적 = 작년 봄에는 경주로 신라 고도를 방문했고 금년에는 평양으로 낙랑과 고구려 유적을 방문한 뒤에 경성의학회(京城醫學會)에 참가하고자 경성으로 들어갔다. 호텔로 세키노(關野. 세키노 타다시< 關野貞 >를 말함) 박사를 방문하자, 박사는 며칠 전에 발견한 백제시대 유적에 관해 말했다. 이번 큰물로 한강 흐름에 변화가 생겼고, 흙탕물은 풍납리 마을을 지나 흘러 강안 토사를 씻어내렸다.

며칠 전 박물관으로 고동기(古銅器) 2개를 팔러 온 자가 있었다. 발견지를 듣고 가보니 풍납리였는데, 큰물에 씻겨간 토사 단면에 커다란 항아리(壺)가 노출돼 있었으니, 동기(銅器)는 이 항아리 속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이 부근 단층에는 무수한 백제시대 고토기(古土器)가 출현하고 있으므로 한번 가보면 어떤가.

그날 세키노 박사의 의견으로는 이곳에는 성벽 흔적도 있으므로 백제왕성 유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인데, 즉, 백제는 이곳에 도읍한 뒤에 부여(공주의 잘못인 듯) 땅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한다).

총독부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과연 훌륭한 동기(銅器)가 있다. 전날 후지다(藤田. 후지다 료사쿠< 藤田亮策 >를 가리킴), 고이즈미(小泉. 고이즈미 아키오< 小泉顯夫 >를 말함)군 등이 채집해왔다는 토기 조각이 많았다.

신라 토기와 흡사하지만 토질이나 문양 상태 등이 다르다. 5만분의 1 참모본부 지도를 보니 경성에서 동쪽으로 2리반을 떨어진 광장리 한강선착장 조금 하류에 풍납리 촌락이 있다. 과연 이곳에 남북 12-13정(町), 동서 10정 남짓 거리에 제방이 드러나 있다.

다이쇼(大正) 14년(1925) 9월 25일은 쾌청했다. 총독부 의과대학장 시가(志賀) 박사와 고등학교 교장 오다 쇼고(小田省吾)씨와 함께 광장리(지금의 광진구 광장동)를 자동차를 빌려 달렸다.

너울대는 한강 물을 건너 맞은편 강안에 이르자 강과 인접한 단층에는 이르는 곳마다 크고 작은 무수한 백제시대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노출된 토기 중 굽다리잔(高杯) 완품과 항아리(壺) 완품을 얻었다. 토기 중 어떤 것은 고식(古式) 신라토기를 닮아 있으나 어느 것은 낙랑(지금의 평양 일대) 주변의 중국 토기와 흡사하다.

계속 나아가 성벽을 넘었다. 성벽은 높이 2장(丈) 쯤 되는 토벽이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토성 서쪽은 홍수로 씻겨 내려가 흔적도 없다. 성 안쪽은 밭으로, 이곳에는 풍납리 소부락이 있었으나 홍수로 집은 유실되고 기와와 돌이 흩어져 있으며, 여러 곳에 큰 구멍이 생겨 물을 뿜어내고 있다.

참담한 폐허의 마을 벌판에 앉아 점심을 먹고, 돈이나 벌 요량으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한 동네사람에게서 채집한 토기편을 건네받고는 한동안 (토기) 채집에 시간을 보냈다. 기와 조각은 적지 않으나 평평한 겉면에는 새끼무늬가 있어 고구려 평기와를 닮아 있다. 옅은 쥐색의 기와 뿐이었으며 와당은 볼 수 없었다.

오후 2시, 유적지에서 강 벌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선착장으로 나와 다시 자동차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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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천마총의 영광 2006.03.23 09:09:16



깡패 영화 '가문의 영광'이 있다.
김정은-정준호 커플이 주연했으며, 김정은이 극중에서
눈물 질질 짜면서 부른 '나 항상 그대를'인가 뭔가 하는 구닥다리 가요가 다시금 빛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거니와,

하지만 내 보기엔 이 영화는 조연인 유동근을 위한 영화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빛이 났다.
암튼 그 줄거리야 잘 알터이고, 또 요즘도 내가 즐겨보는 ocn이며 슈퍼액션이며 하는 영화 케이블 전문채널에서도 줄기차게 틀어주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 영화에서 계란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

정준호-김정은이 서울서 기차를 타고 여수인지 하는 김정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있거니와,
여기에서 정준호가 삶은 계란 1판을 사서 어거적어거적 먹는 장면을 연출하고,
계란으로 배부른 그가 잠든 사이, 새침떼기 김정은 또한 계란 1판을 먹어대는 장면이 나온다.

재털이 비슷한 용기에 두 개가 담긴 계란은 언뜻 보아 김정은-정준호가 씹어댄 삶은 계란만 같다.
갓 삶아낸 계란.

하지만 놀랍게도 저 계란은 나이가 1천500살이다.
1973년 발굴된 경주 천마총이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계란이다.

저 계란이 1판 가량이나 다량으로 무덤에 출현했을 때 고고학자 역사학자들 반응은 참으로 다양했다.
개중 그럴 듯한 주장으로는 신라 건국신화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에 이르되, 박혁거세가 출현할 때 대형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나아가 신라 삼성 시조 중 또 다른 한명인 김알지 또한 그가 태어날 때 그 광명의 빛을 닭새끼가 인도했다고 되어 있거니와,
이를 연상해 계란을 신라인의 닭 숭배 신앙과 연결하곤 했던 것이며
지금도 이런 추세에는 그다지 변함이 없다.

왜 계란을 1판이나 넣어주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저승에서의 삶을 위한 음식물일 것이다.
영생불멸. 영혼은 영생하며 불사한다고 생각했기에 
또 무덤은 그런 死者가 영원히 사는 집이요 궁전이라 생각했기에 사자를 위한 봉납물이 계란이었던 것이다.

아! 계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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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일본인이 촬영한 점제현 신사비 2005.10.30 00:25:22

이 사진 말입니다. 1916년에 촬영된 것으로 한 때 아주 유명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국사교과서라든가 한국사 개설서 앞 부분에 거의 빠짐없이 보였던 적이 있습니다.

사진보다 이 사진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점제현 신사비라는 것도 그보다 더 유명세를 탄 적이 있습니다. 왜냐?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석문 중에서도 가장 연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점제현 신사비란 무슨 개뼉다귀이며, 그렇게 유명했던 점제현 신사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는가?

이 점제현 신사비란 금석문은 1913년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옛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란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자는 당시 도쿄제국대학 고건축 담당 교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교토제국대학 강사로서 조선사를 강의하던 이마니시 류(今西龍)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식민지시대 초반기 식민지 조선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각종 고건축 조사라든가 고고학 발굴을 사실상 주도한 쌍두마차인데, 모두 조선고적조사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세키노는 고건축에다가 고미술학자로서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근대적인 의미의 고건축이라는 학문, 고미술이라는 학문을 정립시킨 인물로 평가됩니다.

석굴암. 흔히 이를 두고 동양최대 석굴미술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상 석굴암을 이렇게 평가한 첫 주인공이야말로 세키노 타다시입니다. 일본이라면 무턱대고 씹어먹지 못해 안달인 한국인이 상당한데, 다시금 부탁하노니, 제발 우리를 좀 알고 나서 비판할 게 있으면 했으면 싶습니다.

후자 이마니시 류란 사람은 한국고대사학계에 있어서 김부식 같은 사람입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한국사에 대한 연구는 그 거대한 뿌리가 바로 이마니시에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역사학자입네, 고건축학자입네, 고미술학자입네 자처하는 사람들은 심하게 말하면 이 두 사람이 죽은 날에는 어김없이 일본을 향해 제사를 올려야 할 정도로 저들이 차지하는 사학사적 위치는 莫重無比합니다.

애이웨이, 이 점제현 신사비는 이 둘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재료는 화강암, 크기는 높이 130센티미터에 너비 109센티, 두께 21센티 정도였지요. 비신 윗부분은 일부 파손되었습니다. 당시 이 비문에서는 80여자에 달하는 예서체 글자가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지방군현에서 행한 농경의례 중 산신숭배와 관련된다고 합니다. 20자 내외가 잘 판독되지 않아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건립연대는 후한시대 원화(元和) 2년(서기 8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하지만 나로서는 이 건립연대를 긍정하기는 힘듭니다) 비문에는 이런 농경의례를 주관한 군현이 '점제현'이라 보이고 있어, 그래서 지명을 따서 우선 '점제현'이라 하고, 그 내용의 제사와 관계된다 해서 '신사비'라 한 것입니다.

이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 마침 성현리토성이라고 하는 고대 성곽과 인접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이 토성이 점제현 치소, 즉, 점제현을 다스리던 최고 관청이 있던 곳이라고 간주합니다.

최근 북한에서는 이 비석이 애초에 이곳에 없었는데 어딘가 외부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화강암 재질 분석 결과 현지에서 생산되는 게 아니며, 둘째, 발견지점이라는 곳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이 신사비와 관련될 법한 고고학적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한마디로 점제현 신사비는 이곳에 없었는데 고대 한반도를 중국 식민지 만들기에 혈안이 된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역사를 날조하기 위해 만주쪽 어딘가에 있던 비를 고의로 이곳으로 옮겨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남한 학계 일부와 재야사학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마침 70년대 이후 거센 민족주의 열풍이 남북한 모두 몰아치면서 한반도가 한 때 중국 식민지였다는 사실(혹은 주장) 자체를 말살하려는 움직임 또한 거세졌습니다. 이 와중에 국사교과서만 해도 그 이전까지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서 설치한 낙랑.진번.임둔.현도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또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북한 일대로 당연시되고, 그 구체적인 지리 표시까지 제시되었으나 지금은 아예 한사군 위치에 대해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만주쪽이라고 주장하는 듯도 하다가 평양이라 주장하는 듯도 합니다.

이런 풍조에서 점제현 신사비 또한 무사할 리 만무했지요. 언젠가부터 각종 교과서와 개설서에서 슬그머니 빠지지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종적을 감추다시피 해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에 덩달아 위만조선 또한 급속히 그 우머머리요 創業主인 위만이라는 자가 중국 연나라 도망민이라 하여 '국사'의 영역에서 축출당했으며, 기자조선 또한 기자라는 놈이 중국놈이다는 이유로써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민족하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이토록이나 역사를 자신들의 욕망대로 그 욕망이라는 틀에다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를 찍어내는 주물공(鑄物工) 역할을 했습니다. 

단재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반대편에 위치한 백남운 등의 사회경제사학(소위 막시즘 사학) 또한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으며, 이들에 대한 역사의 객관성을 부르짖은 소위 실증주의 계열, 나아가 그 후신들을 자처하는 80년대 이후 민중사학(사실 이 민중사학의 꼬락서니는 북한 주체사학보다 더 꼴불견입니다만, 실증주의 후신들을 자처하는 역사를 위한 역사학 또한 그들이 구축한 역사는 정말로 못봐줄 지경입니다) 또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역사를 주물하고, 그렇게 주물된 역사를 '전통'이라 선전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역사는 당대사라는 역사가 크로체의 언설은 여전히 유효한 지 모르며, 역사는 발명되고 조작된 결과물이라는 막시스트 역사이론가 에릭 홉스봄의 언설 또한 유효한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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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컵에서 C컵으로 : Ms 나주 글래머된 사연 2005.10.17 20:38:25

경주가 아닙니다.
대릉원이 아닙니다.
천마총이 아닙니다.

전라남도 나주 반남면 대안리라는 한적한 시골 농촌 허허벌판 한복판을 차지한 거대 봉토 고분들입니다.

거대하다구요?

문제는 저 무덤을 누가 저렇게 거대하게 만들었냐 이거지요?

저 무덤은 브래지어로 생각해도 대과가 없습니다.

애초에는 A컵이었는데 누군가가 C컵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가? 백제인들이?

그랬다면 오죽이나 좋게요?

신라에 꿀릴 수 없다 해서,
경주에 뒤질수 없다 해서 복원한답시며 마구잡이로 봉분에다가 흙을 퍼부어 올렸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무덤이 커진 겁니다.

무조건 커야 한다는 강박증, 그것이 문화유산을 좀 먹고 역사를 좀 먹고 
나아가 남성들을 좀 먹고 있습니다.

저런 일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도 저질러졌습니다.
옹긋봉긋, 백제왕릉이 신라 왕릉에 뒤질수 없다 해서 70년대 정비과정에서 모조리 글래머가 되었습니다.

거대함에 대한 강박증.

오죽했으면 내 전자명이 지도로1자5치이겠습니까?

지증왕 짬지는 1자5치였다.

그러고 보니 커야 한다는 저 강박증 환자는 나였군요.
어이쿠 쪽팔리라.

참고로 저 사진은 2005년 10월 13일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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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선녀 부채로 보는 구운몽(九雲夢) 2005.08.06 20:38:05



 조선시대에 출현한 한글소설로 교과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만중(萬重)이 김씨(金氏. 1637~1692)가 찬(撰)한 ≪구운몽≫(九雲夢)이란 요상한 이가 있지요.

    구운몽이라? 직역하면 '아홉 구름꿈'이다. 여기서 문제는 九가 수식하는 말이  雲인가? 아니면 운몽(雲夢)인가? 즉, 구름이 아홉개란 말인가? 아니면 운몽이라는  꿈의 일종이 아홉개란 말인가? 난 모르겠다.
   
    이 작품에 대한 소위 교과서적 국문학사적 자리매김을 볼까나? 유,불,선의 3교 사상을 취합하여 인생 일장춘몽을 설한 환상문학의 원류라나 어쨌다나?

    이 ≪구운몽≫이란 소설은 만중이가 중앙 권력 투쟁에서 패한 뒤 남해란 곳에  유배가 되어 있던 숙종 15년(1689) 무렵(53세) 홀어미 윤씨(尹氏)를 위하여 그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줄 요량으로 쓴 것이라 하는데 삼교(三敎) 중에서도 인생허무를 역설한 불교의 공(空)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나 어쨌다나 하는 설이 횡행하고 있다.
   
    이 숙종이란 인간, 조선의 군주 중에서도 신하들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한  변덕군주의 대명사인데 희빈 장씨에게 놀아난 이 요상한 아버지에게서 어찌도  경종이며 영조니 하는 희대의 성군(聖君)이 출현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구운몽≫은 그 내용을 볼짝시면 육관대사(六觀大師)라는 고승대덕(高僧大德)에게 성진(性眞)이라는 망나니 같은 젊은 제자가 있어 그가 하룻밤 꿈을 꾼 이야기가 전부이니라.

    육관대사라? 이름에서 벌써 노숙한 티가 나지요?  육관(六觀). 우주 삼라 만상 진리를 관통하는 눈알(이를 철학적으로 직관력이라고 한다)이  1개도 아니요 6개나 있으니, 그런 육관에게 망나니 제자 성진은 부처님 손바닥에 놀아나는 손오공 꼴이 아닌가? 성진(性眞)? 이 이름도 요상타. 본성의 진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거니와 이런 꿈 여행을 통해 스승 육관(六觀)을 뒤이어  대오각성(大悟覺性)한 고승(高僧)의 자질이 있지 않을까 암시하는 말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진이 하룻밤에 꾼 일장춘몽(一長春夢)은 무엇인가?
    나는 구운몽(九雲夢)이라는 말에서 짙은 sexual conotation을 본다.

    혹자는, 아마도 교과서적 훈련을 충실히 받은 사람들은 내가 그토록이나 존경해  마지 않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호접몽(蝴蝶夢), 즉, 장주(莊周=장자)가 어느날  자빠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되었느니, 깨어나 보니 장주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주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저 타령을 말하니, 혹여 모를 일이다. 현철이가 벌떼들  시절에 발표한(벌떼를 떼어버린 시절인가?)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봐'가 이 장주의 호접몽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었는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구운몽 대요(大要)를 적어도 내가 일선 중고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곧잘 "이 작품에 나타난 사상을 한자성어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늘상 남가지몽(南柯之夢) 혹은  한단지몽이라는 정답을 강요받았거니와, 정말로 저 ≪구운몽≫이 說하는 사상의 대요는 일장춘몽이요 남가지몽이며 한단지몽이란 말인가?

    내 보기엔 웃기는 소리다. 왜? 인생만사 일장춘몽이라면 그런 사상을 담은 소설작품을 과부인 엄마를 위해 만중이가 썼다면 그런 사상을 담은 작품을 읽고  홀어미이자 과부의 2대 타이틀을 지닌 어머니더러 그만 사시고 죽으라 했단 말이더냐?

    나는 그것을 역설로 보거니와, 소위 인생허무를 설하는 불교나 도교나 진배없이  그러한 역설을 통해 어느 사상보다 종교보다 철학보다 生에의 욕구를 갈망했다고 보느니라.

    일전에 내가 벽제화장장이란 곳에 갔다가 모 친척이 1시간 반 만에 한줌 뼛가루고 되어 나온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다짐한 적이 있다.

    "기와 저렇게 될 바에야 비름빡에 똥바를 때까지 아둥바둥 살기로 했다."

    고 말이다. 무슨 일장춘몽. 기와 주어진 삶. 빼카번쩍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7일을 살기 위해 7년을 땅속에 보낸 저 매미 같은 삶은 싫으니라.

    나는 만중이가 어미를 위해 구운몽을 지어바친 까닭 또한 그렇게 본다. 인생 어차피 저 모양인 걸, 기왕 과부 되셨으니 아둥바둥 잘 사세요. 뭐 이런 문제의식을  담지 않았겠는가? 정말로 일장춘몽을 담았다면, 귀찮은 어미더러 머리 깎고  비구니라 되라고 했겠지 않은가?

    이크, 내 주특기는 골자로 가는 듯 하다가 옆길로 새는 꼴이라, 지금도 그 모양이 벌어지고 말았으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이 구운몽은 중국 당나라 때 남악(南岳) 형산(衡山)이란 곳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거니와, 형산을 남악으로  일컫는 것은 중국에서 오악(五岳)으로 간주된 다섯개 산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남쪽에 위치한다 해서 일컫는 별칭이거니와, 그에 견주어 북악(北岳)은 항산(恒山)이란  곳인데 산서성에 있으며, 동악(東岳)은 산동성에 있는 태산(泰山)이며, 서악(西岳)은 화산(華山)이란 곳이며, 중악(中岳)은 숭산(崇山)이란 곳이니라.

    이들 오악(五岳)은 불교보다는 도교와 밀접하나니, 곧이어 말하겠지만  팔선녀(八仙女)라는 명칭 자체는 물론이고 한 때 잘 나가던 시절 핑클이나 ses를 모다 놓은  듯한 쭈쭈빵빵 8 girls 또한 도교신학과 밀접하니라.

   구운몽에 의하면 성진(性眞)이란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는 팔선녀를 갖고 놀다가 그 죄로(성폭력특별법 위반인 셈이다) 인간세상으로 쫓겨나 양소유(楊少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한데 이 불한당이 대가리는 좋아 어린 나이에 급제하여 하북에서 일어난 삼진의 난과 토번의 난을 평정하고 그 공로를 발판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 되었으니,

    고대 중국에서 삼공(三公)에 책봉되면 땅 떵어리 뚝 떼어, "야, 너 이제부터 그  지방에서 나오는 세금은 네가 다 먹어라"하는 독점적 권리를 천자에게게 할양받게  되나니, 아 좋겠다. 세금 지 마음대로 거둘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성진이란 자는 승상 책봉과 더불어 위국공(魏國公)이 되나니, 옛 위나라 땅을 분봉받았다 해서  이렇게 일컬어졌으니 이 위국(魏國)이란 땅을 볼짝시면 대체로 지금의 황하 중하류 요지에 해당한다.
   
    한데 승상이 되고 위국공이란 타이틀까지 덮어쓴 성진은 부마까지 되었으니, 부마란 무엇이더냐? 왕의 사위 아니던가? 그 때나 지금이나 돈 많고 권력있는  망나니들에게는 여자 관계가 복잡하니, 성진은 천상에서 같이 쫓겨나 지상에 새로 태어난 팔선녀 그룹과 차례로 만나 알콩달콩 고슴도치처럼 새끼치면서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한데 말이다. 이렇게 살던 성진이가 어느날 원 데이 인생무상하다 느끼는  순간에 호승(胡僧), 요즘으로 치면 뭐라고 할까? 서울역에서 만난 미국인 몰몬교 선교사라고 할까? 뭐 그런 사람을 만나 퍼뜩 깨달은 바가 있어 마누라 떼거리를 모다 거느리고 불문(佛門)에 귀의했다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누구나 이렇게 느끼리라. 니기미, 인생무상 설혹  느끼더라도 저렇게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한데 하필 성진의 여자들은 8명이며 그들은 한결같이 쭈쭈빵빵인가?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도교의 방중술로 들어가야 한다. 도교는 영원불사하는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종교적 체계요 신념이라. 한데 인간은 죽는 법. 이를 타개키 위해 부당히 노력하니 우화이등선하는 방법 중 하나로 도교는 바로  방중술(房中術)을 중시하니라. 방중술이란 무엇이더냐? 볼짝없이 섹스이니라.

    뭐 말로는 무자비한 섹스, 무차별한 섹스가 아님을 각종 도교신학서(예컨대  포박자)는 설하고 있으나 웃기는 소리다. 언제 섹스의 환락에서 절제를 생각한다더냐?

    이런 방중술에서 도교는 1. 절대 사정하지 말 것 2. 되도록 하룻밤에 많은 여자와 그룹 섹스를 할 것, 3. 그런 여자들은 절대로 30살이 넘어서는 아니되며  한번이라도 임신을 한 적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3대 원칙을 역설한다.

    이 8이라는 숫자. 조계종에 귀의한 사람들이야 이 숫자를 보고 퍼뜩 8정도(八正道)라는 다소 거창한 불교철학 용어를 생각할 지도 모르나, 이런 불교와 뗄 수는 없으나 도교에서는 8선(八仙)의 신앙을 계발하니, 역사상 이름난 도사 중에서도 8명을  하필 골라 잡아 그들이야말로 진정 신통력 뛰어난 도사였노라고 설하고 있으니, 게 중 대표 주자가 여동빈이라는 자이니라.

    이런 팔선 신앙을 가장 적절히 이용하여 권력 탈취를 노린 자가 바로  김부식에게 개박살이 난 요승 묘청이란 자이니라. 이 묘청의 8선 신앙까지 얘기하자면  야그가 너무 길어지거니와,

    애내웨이 본령으로 돌아가자면 8선녀와 질펀히 놀아나는 구운몽은 이와 같은 도교의 섹솔로지, 즉, 방중술을 근간으로 삼는 문학이라. 저 夢이라는 글자는 볼짝 없이 몽설(夢泄), 즉, 몽정(夢精)과 관련이 되나니, 그런 점에서 저 구운몽이야말로  실로 섹스문학의 보고라고 할 지니라.

    아! 과부가 된 어미를 위하여 방중술을 근간으로 하는 섹스문학 작품을  바치다니, 만중이 김씨는 이런 점에서 D.H. 로렌스라 할 지니라.

    지금까지 구운몽과 관련한 나의 문학 강의는 믿거나 말거나였습니다.

    저 부채에 그려진 팔선녀 그림을 보다가 갑자기 구운몽을 생각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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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신라인의 검은 생식기 크기가, 2005.06.05 00:50:45

궁금하신 분들은 제가 특별히 고안한 방식인 담배 라이터와의 비교 사진을 참조토록.

저 라이터 어느 술집에서 나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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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잡은 신라인, 그들의 거시기는 검었다! 2005.06.05 00:46:37



경주 평야 최 중심부인 황룡사 터. 그 동남쪽 통일신라시대 왕경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검은 자지.

귀두(龜頭) 부분과 몸뚱아리 일부만이 남아있고, 그 나머지 뿌랑지 부분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오인 줄 알고 누가 잘라 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표현이 대단히 생동감 있는데 허나, 너무 사실적이어서 징그럽다는 반응도 꽤 있다. 특히 female 사이에서 그런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징그러버라.

한데 왜 저리도 시커먼가? 시커먼스?

한데 왜 포경수술을 한 것처럼 보이는가? 신라시대에 이미 포경수술이 있었다?

포경한 상태로는 생식력이 떨어진다 생각했는가 아니면, 그 주술력이 감퇴된다 생각했는가?

지도로 대왕, 지증왕을 생각하며 이 밤에 숙직하며 한 번 긁저거려 본다.

신이여! 나에게도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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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신발, 하지만 화려한 금동신발 2005.04.13 18:33:20
註 : 2003년 12월11일, 공주 수촌리 고분군 발굴 성과를 계기로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양식 고찰 외에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이 무심히 보는 신발, 그 의미를 도교신학으로 해석해 본 것이다. 맞는지 틀리는지 자신은? 없다. 누가 봤어? 한번 싸질러 보는 거지 뭐! 바트, 하우에바! 난 승산없는 도박은 안 한다. 내가 설혹 사기를 친다 해도, 입만 달면 실증 고증 학문적 진리 운운하는 저들에게 그 사기성의 농도가 결코 더 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한다. 내 보기엔 쓰레기 같은 논문과 쓰레기 같은 책이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 저 쓰레기에 희생되는 동남아시아 밀림에 恨하노라.

<영생(永生)과 등선(登仙)의 도구 금동신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이번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군을 비롯해  삼국시대 무덤에서는 금동(金銅) 신발이 더러 출토되고 있다. 그곳에 묻힌 주인공의  지위나 신분이 높다고 생각되는 무덤에서는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신라를 보면, 4-6세기 경주에 집중 조성된 적석목곽분들인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을 필두로 금관총.금령총.천마총.식리총과 경산 임당6A호분.대구 달서51-2호분.달서 55호분.의성 탑리2곽.양산 부부총 중 남편쪽  무덤  등지에서 금동신발이 확인됐다. 

    백제는 무령왕릉 출토 2켤레와 익산 입점리 1호 석실분 출토 1켤레, 나주  복암리 3호분 출토 1켤레 등이 있으며 이번 수촌리에서도 여러 점이 확인됐다.

    비슷한 시기 일본열도 고분에서도 금동제 신발은 더러 발견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매장 풍습은 대체로 4세기 이후라는 특정시기에 갑자기 나타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급격히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 무렵에  금동신발을 무덤에 부장케 하는 어떤 '문화 충격'이 가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금동신발을 무덤에 넣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왜  금동신발인가 라는 단순한 의문조차 제기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금동신발은 한결같이 비실용이라는 특성을 공유한다. 대부분 크기가 300㎜를 넘고 있으며, 구조상 허약한 금동 못(스파이크)을 바닥판에 대고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결코 실용품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장례를 위해 특별 제작됐음은 말할 나위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금동신발 부장에는 필연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문을 해명하기 위해 신발이 갖는 원초적인 기능을 재음미해야 한다.  신발은 어떤 곳에서 다른 어떤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신발이 무덤에 들어가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죽은  이가  어딘가를 떠나 다른 어떤 곳으로 옮겨간다는 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금동신발을 신은 죽은 이가 갈 곳은 천상이나 황천밖에 없다.

    그렇다면 죽은 이에게 금동신발을 신겨 주어 그를 이승이 아닌 또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고자 한 사상의 연원은 어디일까?

    이와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전통이 도교이다. 도교는 간단하게는  영원한  삶을 누리는 신선이 되고자 하는 신념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신발은 특히 신선의 여러 등급 중 하나인 시해선(尸解仙)과 밀접하다. 

    이미 전국시대 문헌인 「열자」에서 뚜렷한 흔적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해선이란 말 그대로 육체를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 하늘을 떠 다니는 신선을 말한다. 

    시해선은 흔히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매장을 했다가 나중에 무슨 계기로 무덤을 파 보니 시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신발만 남았다는 도교신화나 설화에서 무수하게 확인되고 있다. 노자와 함께 도가의 비조인 황제 또한 전형적인 시해선이다.

    신발을 남기고 신선이 되었다는 시해선 신화는 아울러 신발이 등선(登仙)의  도구였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시체는 없어지고 신발만 남았다는 것은 신발이  등선을 위한 도구로서의 구실을 끝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이들 신발이 첫째, 재료가 그 자체 신선이 됨을 보장하는  선약(仙藥)의 최상급으로 평가된 금이 들어가 있으며, 둘째, 거기에 투조 등의 방법으로 구현된 문양 또한 불로장생과 동의어인 거북이나 용 등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금동신발이 등선도구라는 점과 같은 맥락에서 이번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에서 이들 금동신발과 함께 출토가 되는 마구류 또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왜 마구류를 묻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금동신발을 신은 죽은 사람을 이승이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 옮겨다 준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을 것이다.

    요컨대 금동신발이나 마구류 모두 죽어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불멸의  땅으로 운반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영생(永生)을 획득한 이와 같은 사자(死者)가  잠들어 있는 곳, 즉, '죽은 자가 영원히 사는 집', 이것이 바로 무덤인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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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관람기 2005.03.07 06:38:04
 

<11년만에 공개된 칠지도(七支刀) 관람기> 2004. 1.31


    (나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인구 36만 남짓한 일본 관서지방 중소도시인 나라(奈良)는 한국의 경주에 비견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


    서쪽으로 오사카(大阪), 북쪽으로 교토(京都)와 인접한 고색창연한 이 분지  도시의 곳곳에는 '칠지도'(七支刀) 특별전을 알리는 선전포스터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특별진열 야마토(大和)의 신(神)들과 미술 : 칠지도와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신보(神寶)’라는 화려한 수사 아래 포스터는 칠지도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포스터 배경 그림으로는 고색창연한 철판같은 유물을 이용하고 있다.  이  또한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가장 유서깊은 신궁(神宮)이라는 나라시 인근 덴리(天理) 소재 이소노카미신궁에 전래되고 있는 철 방패(鐵盾) 유물이다.


    지난 28일. 이번 특별전이 열리는 나라국립박물관(관장 와시즈카 히로미쓰.鷲塚泰光)을 찾았을 때, 한국기자단을 전시장으로 안내한 이 박물관 이노구치 요시하루(井口喜晴) 상급연구원은 두 점이 세트인 이 대형 방패가 한국산이라고 말했다.


    5세기 후반에 제작됐다는 주장이 유력한 이 방패에 대해 이노구치씨는  “일본에서의 철 생산 개시 시기라든가, 「일본서기」 및 「삼국지」(三國志) 등 문헌기록을 참조할 때 (철광석 원료는) 전남 곡성에서 산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4일에 관람객을 맞기 시작한 나라박물관 신관 2층 전시실에는 이 방패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가운데 주인공 격인 칠지도는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소노카미신궁 관련된 다른 유물 다수도 찬조 출연을 하고 있다.


    이 중에는 1870년대에 이소노카미신궁 궁사(宮司. 주지)로서 칠지도 보고자인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신궁 구역 중에서 일반인의 접근이 봉쇄된  금족지(禁足地)라는 곳에서 발굴했다는 각종 구슬류와 철기 및 동경류가 포함돼 있다.


    총 길이 74.8㎝. 나뭇가지 같은 ‘새끼날’이 각각 3개씩이 양쪽으로 어긋나게 뻗어있는 이 독특한 칠지도 몸통 앞뒤에는 총 60여 자에 달하는 금상감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을 둘러싸고 이 쇠칼이 백제가 왜 왕실에 헌상했다느니, 하사했다느니, 아니면 단순 선물이라느니 하는 격렬한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쇠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실물은 난생 처음 접한 기자는 무엇보다 금상감된 명문이 종래 각종  첨단기법 등을 통해 판독되어 출판물로 알려진 것만큼이나 선명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금상감이 남아있는 글자는 육안으로도 그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라박물관 가지타니 료지(梶谷亮治) 학예과장은 칠지도 공개는 2000년  도쿄국립박물관 이후 4년만이며, 관서지방에서는 93년 교토국립박물관 이후  11년만이라고 말했다.


    가지타니 과장은 “매년 연초에 신사(神社)별로 돌아가면서 소장 보물을  공개하고 있는데 올해는 이소노카미신궁이 그 차례가 되어 칠지도를 선보이게 된 것이며, 다른 특별한 목적이나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다음달 8일까지 계속될 이번 칠지도 공개는 "종전에는 고작 7-10일 정도만 공개되었으나 이번에는 한달 이상 계속된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말도 했다.


    칠지도에 대한 반응, 특히 한국측 관심을 묻자, 가지타니 과장은 “한국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 관람도 많다”면서 “개막식 때는 1천명이 몰렸고, 그저께 칠지도 강연회에는 전체 좌석 200석이 모자랄 정도로 꽉 찼다”고 전했다.


    기자가 칠지도를 관람한 28일 오후에는 한산한 전시장에 50명 가량 되는 한국단체 관람객들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확인결과 이들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운영하는 박물관 대학 수강생들이었다.


    가지타니 과장은 “전시회 폐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찾을 수 있도록 한국 기자 여러분이 홍보를 많이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박물관측은 한국기자단에게 전시실 전반은 물론이고 칠지도를 포함한 전시유물 전체에 대한 사진촬영을 허가하기도 했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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