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홈연합 블로그 홈블로그홈  l 로그인
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프로의눈] 상식 혹은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정신의 현창을 위하여
《自述》23 중학교 수학여행 2014.03.22 06:19:58

이제는 30년도 더 지난 옛날 얘기다.

우리는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하거니와 수학여행이라는 걸 첨으로 갔다.

국민학교 5곳이 있는 대덕면을 다 합쳐봐야 중학교는 대덕중학교 오직 하나요 그나마 한 학년 3150명 수준이었으니 당시 버스를 몇 대 동원했는지 모르나 이걸로 나눠 타고 날았다.

이때가 내가 김천, 더 정확히는 대덕면을 벗어나 넓은 대한민국 구경한 처음이었다.(이때까지 김천시내 나가 본 것도 손에 꼽을 만했고, 당시에는 축구에 미쳐서 친구들이랑 인근 거창군으로 넘어가 축구 시합한 일이 고작이었다.)

당시 어떤 코스를 밟아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큰 것을 추스르면 아마도 무주 쪽으로 넘어가 남원 광한루에 들렀다가 다시 남쪽으로 죽 달려 광주를 거쳐 목포로 갔다는 것이다. 예서 여수와 충무에 들르는 남해안 코스를 죽 따라 해운대에 들러 해수욕장과 모래사장 구경하고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이 수학여행 계절도 언제였는지 기억에 없다. 앨범도 잦은 이사 과정에서 전부 망실해 버렸고, 또 당시에는 우리 집에 사진기가 있을 리도 없어 두어 장 남은 그때 수학여행 사진도 이제는 영영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수학여행 사진을 보니 국립광주박물관 정문에서 찍은 것이 있었다.

이를 둘러싼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마지막 코스인 해운대 해수욕장에 가서 바닷물이 진짜로 짠지 맛을 봤다는 것과 더불어, 그 모래를 운동화에 일부러 그대로 담고 왔다는 기억, 이것이 남는다. 이 모래는 신발 속에 가져와서는 우리 집앞 동네 개울에 쏟았다. 그 모래, 아마도 태풍 루싸에 휩쓸려 다시 해운대로 갔을지 모른다.

맨 처음 들른 광한루는 기억에는 있지만, 도대체 무엇을 봤는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고 고목 위 까치집 비스무리하는 게 있어 저걸 장대로 쑤셔보겠다는 욕심은 많이들 낸 것으로 기억한다. 이 광한루를 물경 30년만인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에 가 봤다. 그 때 기억은 아무것도 없지만 30여 년 전에 이곳에 왔었다는 그 기억 하나만으로, 그리고 그때와 무척이나 달라진 환경에 가슴 한 켠이 울컥했다.

해운대 해수욕장 짠물 보기 사건과 더불어 그나마 또렷한 기억 하나가 목포 유달산이다. 우리는 다도해라는 말만 들었지 그것을 실물로 보기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장관이 무엇인지 모르나, 나는 그때가 장관이라는 생각을 했다. 목포는 내가 현재 종사하는 일 때문에 여러 번 갔고, 그때마다 유달산을 바라볼 적이면 그때 생각이 나서 묘했지만, 아직 다시는 유달산에 올라보지는 못했다. 이젠 함 가봐야 겠다.

이런 수학여행과 관련한 기억의 편린은 일전에 정리한 적이 있지만 기록을 망실해 다시 적어둔다.

코멘트(0)     트랙백(0)
《自述》 22 소값 파동(2)과 미군방위 되기 2014.03.11 04:48:17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과는 이렇다 할 만한 말이 없던 선친이 모친한테 이렇게 말을 했단다.

태식이 군대 가야 할낀데...”

나는 이 말을 끝내 선친한테는 직접 듣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송아지 팔아 대기로 한 등록금 마련이 이젠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황송아지 한 마리 기준 150만원 하던 소값이 하루아침에 15만원으로 곤두박질을 쳤으니 무엇으로 학비를 감당하리오?

이런 가운데 결론을 말하자면 그런대로 이런저런 빚을 내어 2학년 두 학기는 그런대로 버텼다. 하지만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여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내핍 생활을 줄곧 한 듯 하지만 실상은 전연 달라 당구장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생활은 계속했다.

더불어 어차피 군대는 피할 길이 없으니, 기왕이면 일찍 다녀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실컷 놀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며, 그 이후가 되면 어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내가 주한미군에 복무하는 카투사(KATUSA)에 지원 입대 시험을 치기로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 이전에는 카투사라는 제도가 있는줄을 내가 알 리 있겠는가? 어찌 하다 보니 주변에서 그런 제도가 있고, 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더구나 미군부대 생활이라 한국군의 그것과는 달리 왕청나게 편하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물론 이 무렵에 이를 둘러싸고 곱지 않은 시선이 적지 않았다. 내가 카투사를 지원하던 1987년 초반이 어떠한 때인가? 대학가에서는 전두환 독재타도를 외치던 구호가 난무했다. 그해 중반에는 마침내 정국을 뒤흔든 사건이 터졌다. 연세대 시위에서 한열이가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다. 한열이는 나랑 학과나 단과대가 달라 일면식도 없지만 나랑은 입학동기다.(아마 이 친구가 재수한 것으로 기억한다) 한열이 사건이 터졌을 때 이미 나는 카투사 시험에 합격해 그해 1120일 논산으로 입대하라는 징집장을 받아둔 상태였다.

더불어 이런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구호가 당시를 난무했다. 양키 고우 호움....이런 구호가 난무하는 시대에 카투사는 미군방위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시선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미군방위건 지랄이건, 군 생활이 편하다 하고, 더구나 툭하면 주말마다 외박을 나온다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마다할 마뜩한 이유가 없었다. 여담이지만 미군방위 카투사 생활에 염증과 분노를 느껴 내가 복무한 부대 어떤 선배는 자원하여 한국군으로 원대 복귀한 사람도 있다.

카투사 입대 시험은 내 기억에는 그 해 초반 무렵에 쳤을 것이다. 시험 과목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국어 국사 영어의 세 과목이 아니었나 한다. 이를 위해 따로 시험 준비를 한다는 건 좀 이상했다. 그만큼 당시에는 카투사 시험이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 나로서는 시험 이틀 전부터 국사만 문제집을 풀어본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은 어디에서 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보니 1120일 입대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시험으로 당시 뽑은 카투사는 450명 정도가 아니었나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때 뽑은 카투사를 국방부에서는 생년월일에 따라 그 빠른 순서로 세 묶음을 했거니와, 우리 기수에 대략 150명을 뽑았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지막 무리에 묶여서 소값이 폭락한 현실을 뒤로하고 군대로 도피했다.

코멘트(0)     트랙백(19)
《自述》 21 소값 파동(1) 2014.03.09 18:26:14

이에 대해서는 한두군데 초해서 올린 적이 있지만 그것을 찾을 길이 없어 다시 정리한다.

내가 당시 관련 기록을 열람하고 그에 기초해서 말해야겠지만 어차피 이 자리는 기억에 의존해 그 때의 일을 말하고자 하므로, 순전히 내 기억과 그것의 바탕인 경험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 정확히는 문중 소작인 집에 태어난 내가 나름대로 한국사회에서는 이름이나 있다는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등록금이 있어야 하고, 하숙비가 있어야 했지만 소작인 집안 아들이 이를 무엇으로 감당하겠는가?

요새 내 고향에서 소를 키우는 집은 거의 없다. 지금은 두어 집에서 집단으로 한우를 키워 그것으로써 주요한 농가 소득원을 삼을 뿐이다. 하지만 시대를 거슬러 80년대로 올라가면 사정이 딴 판이라, 그런 집은 단 한 곳도 없고 거개 모든 농촌 가정에서는 암소 한 마리가 있었으니, 그것의 주된 기능은 농사였다. 다시 말해 써레질 따위에 소를 쓰기 위함이고, 나머지 하나가 소가 낳아주는 송아지를 팔아 마련하는 자금 때문이었다.

소는 임신기간이 정확히 어찌되는지는 찾아봐야겠지만, 대개 성년 암소는 1년에 한 마리 새끼를 낳는다. 간혹 두 마리를 낳기도 하는데, 이건 사람이 쌍둥이를 낳는 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한데 이 송아지는 거개 내 세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렇듯이 실은 자식들 학자금을 마련하는 원천인 경우가 많았고 나 역시 그러했다. 소와 관련한 정부 정책이 어떠했는지 당시 내가 농촌에서 자랄 적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부에서는 농민 보호를 명분으로 이 소값은 매년 일정한 값을 유지했으며, 그런 측면이 있었기에 그 값이 폭락함을 막는 장치가 있었다.

송아지는 암송아지에 비해 수놈이 비쌌다. 몇십만원 차이가 나지 않았나 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6, 등록금은 45만원 안팎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우리집에서는 수송아지를 낳아 이를 팔았는데 150만원 정도였다. 하니 이 돈으로 1, 2학기 등록금은 대강 마련한 셈이었다. 하지만 여타 대학 경비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나는 할 수 없이 부천 송내 단칸방 생활을 하는 누나집에 빌붙어 살아야만 했다. 송내는 지금 풍광이 사뭇 달라졌지만, 인천 부평과 바로 인접한 그 동네 2층 연립주택 2층 단칸방에서 막내누나 부부 집에 빌붙어 살았던 것이다.

잠시 당시 부천 풍경을 이야기하겠다. 지금 부천은 중동이 새로운 도시 중심을 형성하거니와, 당시에는 중동 일대는 온통 복숭아 밭이었다. 지금은 1호선 역 구성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부천 시내에는 당시 세 군대가 있었다. 구로를 벗어나 부천 역내로 들어서면 맨 처음 역곡에서 서고, 그곳을 지나면 부천역에 정차한 다음 송내가 다음 역이었다. 송내를 떠난 전철은 부평으로 내달렸다. 역곡에서 부천, 부천에서 송내가 내 기억으로는 각 구간 길이가 3킬로미터 남짓했는데, 이들 역 사이 많은 공간이 복숭아 밭이었다.

부천을 일명 복사골이라 하는데, 복숭아 밭이 많다 해서 얻은 이름이었으니, 당시는 정말로 명()과 실()이 합치하는 도농복합형 도시였다. 내가 단칸방 얹혀살기를 하던 송내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평과 인접했으니, 내가 살던 곳에는 무슨 군부대가 있었다. 근자에 누구한테 들으니 이 군부대는 오래전에 옮겨갔다고 한다.

본론으로 돌아가 이런 얹혀살기 생활이 오죽 불편한가? 대학 생활에 나름 적응하면서 자연 내가 외박을 자주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친구들 하숙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런 생활이 1년가량 지속되고서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에게는 일대 변동이 일어난다. 이른바 소값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황송아지 1마리 기준 150만원 하던 소값이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15만원으로 떨어진 것이다.

코멘트(1)     트랙백(56)
《自述》19. 해외여행 자율화 2014.03.09 17:46:47

27개월에 걸친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하니 입학동기 중 계집애들은 거의가 씨가 말라 다 졸업하고 몇 명 되지 않는 사내새끼들도 다 군대를 갔다.

그러니 한편으론 섭섭하기만 하고, 캠퍼스는 휑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88년 입학생들과 함께 3학년의 대학생활로 돌아왔다.

먼저 복학한 조한기라는 놈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대로 88학번 생들과 어울려 하반기 대학생활을 해 나갔으니, 그러는 와중에 이들과 내가 왕청 나게 달라지는 대목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개중 두 가지가 생각나거니와 내가 입대하기 전 대학사회를 요동치게 한 양대 구호인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말은 온데간데없어졌다는 점이 그 첫 번째요 다른 하나는 이들이 해외여행 자율화 세대로 그 세례를 듬뿍 받았다는 점이 두 번째였다.

이 중에서도 후자가 일으킨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듣고 보니 웬만한 후배들은 거개 외국물을 먹은 걸로 드러나 이 점이 나로서는 기이한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여권이란 걸 만들고 외국여행을 처음 하기는 아마도 94년 봄(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벚꽃이 만발했다), 지금은 타계한 원폭피해자 김순길 씨의 전후보상 재판 동행 취재를 위해 찾은 일본 나가사키가 처음이었다.

복학과 더불어 등록금 하숙비 등등의 제반 생활경비 일체를 내 손으로 벌어야 했던 나와는 분명 그들은 달랐다는 생각을 했다.

저들이 무전여행이니 배낭여행이니 해서 유럽대륙을 개판으로 만들 때 나는 오전엔 강남 오후엔 목동 저녁엔 또 어딘가로 과외를 가야만 했다.

사람은 자기세대가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을 지니기 마련이다. 나 또한 이런 이질을 경험하면서 우리세대가 가장 불행하단 생각을 했다.

코멘트(1)     트랙백(45)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다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