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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프로의눈] 상식 혹은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정신의 현창을 위하여
기요노 겐지(清野謙次.淸野謙次.청야겸차.발음은 키요노 켄지) 2015.02.01 09:09:46

기요노 겐지(清野謙次.淸野謙次.청야겸차.발음은 키요노 켄지)

きよの けんじ(1885.8.14.~1955.12.27)은 일본의 의학자이자 인류학자이며 고고학자이고 고고학민속학 자료 수집가이기도 하다.

1885, 오카야마현립의학교장 겸 병원장(岡山県立医学校長兼病院長)清野勇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09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国大学)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이후 1914년에 걸쳐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유학해 생체염색을 공부하고는 귀국 후 교토대학 강사가 되다. 1919~1920, 오카야마현(岡山県) 津雲遺跡 발굴에 참가하고 이때 발굴된 인골 분석을 하게 되면서 나중에 원인일본논쟁(原日本人論争)에서 자설을 형성하게 된다.

1921년 의학부 교수가 되고, 생체염색법을 응용해 조직구성(組織球性) 세포계를 발견하고 병리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다. 그 업적으로 1922년 제국학사원상(帝国学士院賞)을 수상하다. 1926津雲石器時代人은 아니누인이 아니다는 논설을 발표하고 원일본인론쟁에서 이후 주류설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1938년 생체염색 연구의 총괄을 독일어 논문으로 발행해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나중에 절도사건에 유죄판결을 받고 1941년 교토대에서 면직된다. 상경해서 태평양협회(太平洋協会) 촉탁이 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인류학자로 참가했다. 大東亜共栄圏 건설에서의 국민 이데올로기적 통일을 적극적으로 꾀했다. 또한 교토대학에서의 애제자인 石井四郎이 부대장으로 있던 만주(満州) 731부대에 대해서는 병리해부 분야 최고 고문으로 일했으며, 인재 확보와 指導 등에서 異常なまでにてこれした”. 전후에는 미국과의 밀약에 기초해 戦犯追及을 피하고, 의연히 의학과 고고학 分野에서 영향력을 남겼으며, 厚生科学研究所長이라든가 東京医科大学 교수를 역임했다. 그러는 한편 전시 중에 저술하기 시작한 3부작인 古代人骨研究づく日本人種論(1949. 岩波書店) 『日本考古学人類学史(1955. 岩波書店) 日本貝塚研究」『日本貝塚研究(1969. 岩波書店)을 전후에 간행했다.

原日本人論争을 둘러싸고

1926년 당시, 일본구석기시대인의 논쟁이 小金井良精의 아이누설로 모아져 있었다. 그에 清野津雲石器時代人은 아이누인이 아니다는 논설을 발표한다. 그것은 1919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岡山県津雲遺跡에서 발굴수집된 조몽인골(縄文人骨) 46구를 비롯해 그가 수집한 일본 각지의 古人骨을 분석해 인골 각 부위의 길이 비율 등을 측정한 것으로, 그 결과 현재의 日本人アイヌ津雲人과 비교하면 훨씬 유사하다는 결론이 붙었다. 그 이유로서 現代アイヌ現代 日本人日本原人なるものがあり그것이 진화하여 남북에서의 인접인종과의 혼혈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日本旧石器時代人의 논쟁에서는 小金井良精アイヌ설이 有力했지만 小金井アイヌ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清野説은 다수으의 학자에게 환영받고, 이후 DNA검사가 主流를 이루기까지 原日本人論争의 주류가 되었다.

1938, 学位論文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그는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日本島는 인류생식 이래 일본인의 고향이다.단언컨대 アイヌ母地占領하고 居住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先祖気宇 広大로 잘 他人種いれて 自己種族으로 同化한 것이었다”. 하지만 清野는 이 直後부터 논조를 전환해 인종적 혼합을 완전 부정한다. 인류가 発祥해서 곧바로 日本人日本地占拠하고 이후 連綿現在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하게 된다. 清野日本民族生成論에서 皇国のありがたさ” “日本民族独自性 ある数理에서 입증한 自説을 읽고서 日本国民으로서의 자각을 높이고 싶었기에 이 책을 쓴 것이다.

그의 논문은 학자들에게 환영받았지만 日本原人과 어떤 인종이 혼합하여 현재의 日本人이라든가 アイヌ이 되었는가는 명확히 표현되지 않았다. 坪井正五郎原日本人論争에서 아이누인의 전승인 コロボックル를 이용한 점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清野 또한 古事記라든가 日本書紀의 전승적 내용인 長脛彦을 언급하면서 발굴된 장신 인골과 関連관련한 자설의 보강이 된 점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清野事件

清野幼少년 시절경부터 考古学趣味로 하고 본업의 곁다리로 古人骨古文書民俗学資料 등의 収集情熱을 기울였다. 1938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진실로 奇妙한 정신상태에서 수집벽이 높아져 京都古寺에서 教典이라든가 古文書를 훔치는 절도사건을 일으켰다. 清野는 체포되고 控訴審에서 懲役 2年 執行猶予 5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일로 清野京大에서 면직되고 濱田耕作 京大総長 또한 사의을 表明하게 됐다현재도 정신병리학의 실례로서 이 사건이 名前せてげられることがある

清野 컬렉션

현재 그가 수집한 자료는 清野謙次コレクション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전람회가 개최됐다. 일본 각지의 유적에서 출토한 인골은 京都大學 自然人類学研究室, 考古民俗資料는 생전에 天理大学 附属 天理考古館에 들어가고 그가 죽은 뒤에는 大阪府立近飛鳥博物館이라든가 埼玉県立博物館에 분산 수장됐다. 장서는 東京大学이나 天理大学 등지에 들어갔다.


^ 真相記者 195011月号
^ 1956年 清野謙次先生記念論文集刊行会編 p.658 石井四郎 発言から
^ 이는 당시 시국으로 볼 때 미묘한
原日本人論争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清野의 論文学者들은 原日本人のことを論文かなくなった
^ 당시 報道에 의하면 그 총액은 200만엔 정도라 한다.
^ 하지만 사임 직전에 병사한다.

参考文献
春成秀爾 縄文文化研究10 清野謙次論雄山閣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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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수남 약력 2015.01.28 08:01:04

김수남 작가 약력 

1949년 제주 출생
1967년 연세대학교 입학, 연세춘추(학교신문)사 입사, 인영회(사진반) 입회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 입사, 결혼
1977년 장남(기증자 유족 대표, 김상훈) 출생
1979년 차남(김재훈) 출생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 퇴원 후 죽음을 의식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
1981년 『공간』지에 「전통의 현장」 연재 시작(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내림굿, 제주 배연신굿, 함경도 망묵굿 등)
1982년 「한국의 굿」 사진 제작, 이 때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열화당에서 출판 제의(전 20권)
1983년 『한국의 굿』 출간(『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 및 기념 사진전 개최
1985년 동아일보 사직, 동아일보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
1985년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주도 촬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 출간
1986년 『한국의 굿』으로 제 13회 「오늘의 책」 수상,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3권 출간(평민사, 『풍물굿』 1권, 『호미씻이』 2권, 『장승제』 3권), 『옹진 배연신굿』 출간
1987년 『강릉 단오굿』(열화당) 출간, 『제주바다와 잠수의 사계』(한길사) 출간
1988년 『韓國心の美』 출간(일본 도쿄), 『한국의 탈․탈춤』(행림출판) 출간,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수상, 일본 촬영(日本の山と海祭り) 시작
1989년 『강사리 범굿』, 『제주도 신굿』, 『양주 경사굿 소놀이굿』, 『통영 오귀새남굿』, 『서울 당굿』 출간, 『빛깔있는 책들, 팔도굿』(대원사) 출간
1989년 중국 촬영 시작
1990년 중국에서 간첩으로 잡혀 조사, 재판에서 벌금형으로 모든 필름 몰수 후 섣달 그믐날밤 풀려남
1990년 『조상제례』, 『전통상례』(대원사) 출간, 연세대학교 강사 「사진촬영과 감상」 강의(1990~1997)
1992년 『안동하회마을』(대원사) 출간
1993년 『황해도 거제도 별신굿』, 『위도 띠배굿』, 『지노귀굿』, 『서울 진오귀굿』(열화당 출간), 「한국 현대사진, 관점․중재」 그룹전, 사진집 『濟州道』 3권 출간(國書刊行會, 일본 도쿄)
1995년 「히가시가와(東川) 사진상」 해외작가상 수상, 수상 기념 사진전 「한국의 무속」 개최, 김수남 사진전 「아시아의 하늘과 땅」 개최 및 사진집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출간
1996년 『아시아의 하늘과 땅』으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
1997년 김수남 아시아 문화탐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석필) 출간, 「삶의 경계」 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참가
1998년 「Schamaninnen in Korea」전 참가(함부르크 박물관, 독일)
1999년 김수남 사진전 「살아 있는 신화 ASIA」 개최, 『살아 있는 신화 ASIA』(연세대 박물관) 출간,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 대학원 강사(1999~2000)
2002년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역임, 방송통신대학교 교재 『여가와 삶』 사진부문 「사진찍기와 자기표현 또는 자기발언」 저술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 위출혈로 수술
2004년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출간, 『한국의 굿』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품될 ‘한국의 책 100’에 선정, 2004 아시아 전토예술 페스티벌 「신의 얼굴」 전시 개최
2005년 「빛과 소리의 아시아」 전시회 개최(인사아트센터), 「Schamaninnen in Korea」 개인전 개최(베를린 Werkstatt Der Kulturen), 사진집 『굿-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출간, 영문판 사진집 『Gut-Shamanic Ritual Ceremony』(열화당) 출간,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전시 개최 및 사진집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출간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 김수남기념사업회 창립, 옥관문화훈장 추서
2007년 「김수남 사진굿 魂」 전시 개최(이사아트센터), 『김수남 사진굿 魂』(현암사 출간), 사진집 『김수남』(김수남기념사업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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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풍납토성 보존관리안 발표에 대한 서울시 입장 2015.01.27 08:36:46

문화재청의 발표는 문화재도 주민보호도 포기한 것.

5년 내 ‘조기보상’으로 해결하자

- 문화재청의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변경에 관한 서울시 입장 -

- 주민보호 측면에서도 기대감만 부풀리는 미봉책
- 2천년 한성백제 유산에 대한 심각한 위협,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난망
- 서울시와 협의 중 일방적 발표 유감 

문화재청이 지난 8일 발표한「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변경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 풍납토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음. 세계유산 등재도 난망해짐.  

주민보호 측면에서도 문화재법 절차에 따라 발생하는 상당한 비용과 기간을 고려한다면 주민부담 등 어느 하나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기대감만 부풀리는 미봉책으로, 문화재청이 이를 철회하고 특단의 재원대책을 통해 향후 5년 안(매년 20%)에 2·3권역을 조기 보상할 것을 강력히 제안함.  

서울시는 현재 재정여건이 녹록치는 않지만 조기보상을 위한 특단의 재원 확대를 강구하겠음. 이는 서울 2천 년 역사의 사실상 출발 지점인 한성백제 유산을 굳건히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시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임.  

후손에게 물려주고 세계와 함께해야 마땅할 한국 고대사를 당장의 예산 부족을 이유로 돌이킬 수 없이 훼손시켜서는 안 되고, 장기간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주민에게 너무 큰 고통인 만큼 주민과 문화유산을 동시에 보호하는 근본대책은 조기보상밖에 없다는 판단임.  

서울시는 문화재청이 발표한 변경계획은 문화재보존과 주민보호 차원에서 공히 타당성과 실효성을 결여해 보상도 개발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판단함.  

첫째, 추가적인 재원대책 없이 보상권역을 2, 3권역에서 2권역으로 축소하는 것만으로는 보상기간 단축효과가 미흡해 20년이 지난 후에나 발굴이 가능함. 마찬가지로 주민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임. 2권역 우선 해결이라는 발표내역이 무색하다는 결론임. 

둘째, 3권역의 경우 보상에서 제외하고 15m 건축높이 제한을 서울시 도시계획조례(2종, 7층:21m)와 일치시켜 주민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는 최소한의 문화재 보호원칙과 기준을 결여한 조치. 3권역에서 사실상 이런 규제완화가 가능한 지역은 현행규정상 총 1,129필지 중 54필지(약5%로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함.  

① 문화재보호 측면 : 문화재 보호목적의 높이 기준을 도시계획에 따라 정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국가사적지역 내 문화재보호법 배제 선언과 마찬가지. 문화재 특성에 따라, 문화재보호법 체계에서 정해야 함. 풍납토성은 지반이 연약한 하천퇴적층이므로 지하 2m이내 굴착제한을 유지하면서 7층을 건축할 경우 토지 내 압력으로 인한 지하유적층 훼손 개연성에 대한 기술적·종합적 검토가 필요함. 

② 주민보호 측면 : 높이규제를 완화해도 건축기준 등에 따른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7층(21m)까지의 건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음으로써 과도한 기대와 혼란을 초래하고 있음. 3권역 주민들은 보상에서도 제외되고 건축완화의 효과도 매우 제약됨으로써 또 다른 피해가 우려됨.  

즉 이 방안은 2‧3구역 공히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임. 

셋째,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작년 말부터 재원확대를 통한 조기보상 방안과 3권역 규제완화 방안에 관한 이견조정을 위해 협의를 진행 중에 있었음. 실현가능성 검토를 위한 전문가 회의도 개최한 바 있음. 그럼에도 문화재청이 서울시와 합의되지 않은 이번 계획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함. 

문화유산은 한 번 파괴되면 되돌리기 어렵고 복원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점에서 제대로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 특히 백제의 전체 680년 역사 중 500년 가까운 기간이 한성백제의 역사이며 한성백제는 2000년 서울 역사의 출발지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문화교류의 중심축임. 오는 6월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이와 연계한 ‘확장 등재’를 통해 대한민국과 서울이 세계적인 문화국가, 역사문화도시 발돋움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가 마련됨.  

서울시는 이러한 이유로 문화재청에 변경계획 철회를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촉구하며, 3권역의 경우 규제완화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주민들에게 실망과 혼란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 만약 재검토결과 3권역 규제완화가 적절히 않다면 3권역을 포함해 획기적 재원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임. 

국가도 서울시도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임. 그러나 지난 수 십 년 간 고통을 겪었고 앞으로도 겪게 될 주민들을 보호하고 우리가 지향해온 문화국가, 역사문화도시로서 백년대계를 마련하기 위해 이러한 결단과 투자는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것이 서울시의 믿음임.  

2015. 1. 15.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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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 1854~1919) 2015.01.12 15:08:27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 1854~1919)


근대기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이면서 미국 워싱턴 D.C. 소재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프리어갤러리(The Freer Gallery of Art) 창립자이다.

1854년 뉴욕주 킹스턴Kingston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학교를 떠나 시멘트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철도회사에 회계원으로 들어갔다. 26살 때인 1880년 디트로이트에 정착한 프리어는 그곳에서 철도 차량 제작업체를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모았다. 20세기 벽두가 되면서 사업에서 은퇴한 뒤에는 여생을 아시아 미술과 미학운동(The Aesthetic Movement)의 미국 미술품 수집에 열을 투신했다. 그의 포부를 그 자신은 “다양한 시기에 제작되어, 여러 양상으로 서로 조화롭게 연계된 미술품을 한데 모으는 것”(to gather together objects of ars covering various periods of production, all of which are harmonious and allied in many way)라고 말했다. 그의 컬렉션 가치에 대해 프리어 자신은 “미(美)의 높은 이상을 증진하는 일”(the promotion fo high ideals of beauty)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렇게 모은 컬렉션을 프리어는 미국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따라 스미소니언박물관은 프리어와 몇 차례 협상을 거치고 당시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선 아래 프리어 컬렉션을 인수한다. 다만, 프리어는 그 생전에는 소유권은 여전히 자신이 갖기로 했다. 이에 따른다면 프리어는 생전에는 ‘기탁’ 형식으로 컬렉션을 넘겨준 것이며, 그 자신의 사망과 더불어 ‘기증’을 한 셈이다. 이런 협정에 따라 프리어는 계속 그의 컬렉션을 늘려갔다. 그 결과 기증 당시 2천500점인 컬렉션은 그가 사망한 1919년에는 거의 네 배로 늘어났다. 사망 직전 프리어는 유언장을 변경해 그의 컬렉션에 추후 스미소니언박물관이 수집하는 아시아 및 극동 미술품을 보강토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프리어 캘러리는 꾸준히 소장품을 늘리게 됐다. 프리어 갤러리는 1923년 찰스 애덤스 플랏(Charles Adams Platt)이 설계해 1923년에 문을 열었다. 이상 그의 생애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 발행한 《Korean Art in the Freer and Sackler Galleries》, 2012, 13~14쪽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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