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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프로의눈] 상식 혹은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정신의 현창을 위하여
목조문화재 화재보험은 필요없다 2014.10.11 11:27:26

***台植案...목조문화재가 왜 화재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냐고 매양 호통을 치지만, 목조문화재 화재보험은 넌쎈스다.

<목조문화재, 화재보험 가입해야 할까?>
국감 단골 문제…무용론도 만만치 않아

2013.10.15 11:36:24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전남 화순군 쌍봉사 대웅전은 평면 정사각형에 목탑 형식을 지닌 3층 목조 건축물이라 해서 1963년 1월21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1984년 4월3일 보물에서 해제됐다. 지금 선 건물은 복원품이다.

화재를 만난 국보 1호 숭례문은 5년3개월에 걸친 복구공사 끝에 지난 5월 준공을 알렸다. 문루 중 상당 부분이 훼손됐지만 국보 자격을 유지한 까닭은 문루 아랫부분인 육축은 멀쩡하고, 목조건축 1층은 대부분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쌍봉사 대웅전의 사례는 화재의 위험에 늘 노출된 목조문화재를 화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가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반면, 숭례문의 사례는 문화재도 화재보험에 들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목조문화재에 대한 화재보험 가입 여부는 문화유산계 주변에서는 늘 논란이 된다. 특히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단골로 다뤄지곤 한다.

15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에서도 윤관석 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윤 의원에 따르면 숭례문은 복원되고도 아직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국보 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해인사 장경판전도 미가입 상태라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이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국가지정 국보·보물 167건 중에 절반인 83건이 보험 미가입 상태다.

언뜻 국가를 대표하는 목조문화재가 왜 화재보험 가입률이 이렇게 낮은가 반문할 수 있다. 실제 이런 시각이 목조문화재를 바라보는 일반 여론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이나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과연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몰라서 이런 일이 빚어질까? 막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문화재청 주변에서는 아예 보험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보험을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보험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지만 쌍봉사 대웅전 사례에서 보듯이 목조문화재는 막상 화재를 만나면 문화재로서 가치는 상실하고 만다. 숭례문 또한 국보 자격을 유지했지만, 보험이 화재를 비롯한 위험성을 원천적으로 감쇄하는 기능이 없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화재보험을 들어야 하는가? 들어서 어떤 이득이 있는가? 등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면서 “그렇지만 국회나 일반 여론에서는 ‘어떻게 화재보험을 들지 않을 수가 있느냐’라는 시각이 압도적이라 떠밀려서 (보험에) 가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 가입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그보다는 근본적인 방재 대책을 강화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효율적이라고 반론한다.

나아가 현실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다.

문화유산계에서는 무엇보다 보험가액 선정의 어려움과 보험회사들의 기피 경향을 든다.

예컨대 숭례문이나 화엄사 각황전이 얼마짜리가 되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나아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보험사들은 문화재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보험에 가입한 목조문화재 중 궁과 능처럼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곳은 흥국생명에 가입해 있다. 연간 보험료 총액은 4천만원이며 보험가액은 1천150억원 규모다. 반면 지자체가 관리하는 문화재는 한국지방재정공제회라는 곳을 통해 역시 흥국생명에 들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다 보니 보험회사에서는 한 건 한 건 계약하지 말고 일괄로 하자고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다”면서 “더불어 보험회사도 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재보험 회사도 문화재를 기피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다가 해당 문화재가 사유재산인 때는 더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한다.

요컨대 목조문화재 화재보험 가입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도 아닐뿐더러, 과연 보험이 얼마만 한 효용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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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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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변영로가 말하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2014.08.18 06:31:32

<<을축년 표류기(乙丑年 漂流記)>>

樹州 변영로(1898~1961)의 술에 얽힌 일화의 자서전인 <<酩酲 40>> 한 토막이다.

그 유명한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얽힌 일화다.

이 글을 수록한 자서전은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처음 출간됐거니와 내가 인용한 텍스트는 1977년 범우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초판 1쇄를 발행하고 1987415일에 발행한 22쇄 발행 범우문고본이다.

첫 대목에 보이는 無爲 無收獲은 이 문고본에 의하면 무위(無爲) 무수확(無收獲)”이라,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이 곤란하다. 혹여 이 책 서울신문사본을 지닌 분은 텍스트를 교감해 주기를 바란다.

=========================================

이거라고 특기할 만한 실태 실적으로서는 그야말로 無爲 無收獲4,5년이 흘러서 을축년 대홍수를 만났다. 말 아니 하여도 기억하는 분은 기억하려니와, 비라 하기로니 그때의 것 같은 줄기차고 기승스런 비는 드물었을 것이다.

幾十日을 연이어 주야의 없이 온다든지 나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이 뒤집힌 듯 그냥 퍼붓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개벽을 생각하고 노아의 홍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각 교통은 두절 상태로 그야말로 물난리는 도처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내가 살기는 혜화동(번지 망각)이었던 바, 이런 경황없는데 술 먹으라고 나오라고 부르는 친구도 지각없음은 물론, 그 모진 비를 무릅쓰고 나간 나도 어지간한 숙맥이나 철부지가 아니었다. 불러간 장소는 나 있는 곳에서 가깝지도 않던 종로 모 酒亭이고 초대한 사람인즉 故 姜相熙 군이었다.

及其 가서 보니 좌중에는 6,7인의 先來客이 벌써 포진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酒客, 不酒客, 그 외에 말썽꾼(성명은 발표를 보류)들이 섞여 있었다. 시종일관 기분이나 감정의 절제를 벗지 못하는 나로서는 때로는 그때그때의 장면 수습을 함에 약간의 참을성은 있었던지라, 안 갔으면 모르려니와 일단 간 이상 暢快하게 끝까지 盡醉한 다음 헤어진 바, 표류기의 본론은 이에서부터다.

하여간 나는 대취하여 술집을 나섰는데, 내가 잡아탔는지 누가 태워들 주었는지 상세至于今 알 길이 없는 중, 인력거 한 대에 托身하여 前記한 혜화동 내 우거를 찾아가려 한 모양이었다.

사정없이 내리퍼붓는 비와 싸우며(물론 전등도 없었다) 질주라기보다 무거운 짐을 끌고 수영식으로 가던 그때 그 당시 車夫의 고통이 어떠하였을지! 기진맥진하였을 것은 상상키 어렵지 않다.

얼마를 집 있는 방향으로 걸었는지, 갑작스러이 차를 멈추고,

다 왔습니다. 댁 문전이올시다.”

하는 차부 말에,

이 우중에 오긴 참 빠르게 왔다.”

하며 어련하라는 듯이 앞뒤 생각 않고 인력거에서 내렸다.

막상 내리고 보니 내 집 문전은 그냥 水宮에를 들어선 듯한데 이제 와서는 술도 언제 먹었냐는 듯 다 깨버렸다. 두리번두리번 나는 四圍를 둘러보려 하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에 들리느니 요란스런 빗소리뿐이었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수건과 옷자락으로 얼굴을 닦고 눈을 부비며 방향을 알아보려 하였다. 문자 그대로 지척을 분간치 못했다. 그때 나의 실감은 앞뒤 진로를 막는 일대 '銀甁'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그때 나의 급무는 철의 장막이 아니라 은의 장막을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어디가 어디인줄 모르는 채로 한걸음한걸음 조심조심하여 가며 발의 감촉으로 길인 듯 하면 더듬어 갔다. 물론 집을 바로 찾아갈 희망에서가 아니라 어디고 비만을 거새일 때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좌우 연도에 혹여나 하는 석유불 하나 빤짝하는 창호 하나도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향하는 곳이 집 가는 길이여니만 치고 나는 걸었다. 발등 위로 흐르는 물이 차츰 무릎에까지 범하게 되며 전후좌우 轟轟한 물소리 귀를 찢는 듯, 나는 분명코 어느 급류권 내에를 들어선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벌써 時已晩矣, 퇴각 개시도 하기 전에 뒤밀려드는 격랑에 휩쓸려 풍덩 하고 나는 걷잡을 새 없이 어디인지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 이제는 그만이라고 모든 것을 단념하는 것이 나의 의식의 최후였다.

몇 시간 뒤인지 나는 눈을 뜬 모앙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슨 곡절이고 세음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희미한 눈과 몽롱한 의식으로 내 집 속 아닌 것은 짐작하였다. 强仍히 정신을 수습하고 필사의 용기를 내어 가지고 반신을 간신히 일으키어 앞뒤를 휘 한 번 돌아보았다.

허나 역시 방향 부지이었던 중, 내가 누워 있던 곳은 한 砂丘 - 아니 사구 위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小砂丘 위로, 그 앞으로는 喉哮하는 濁浪奔馬처럼 달리고 있었다.

추후에 조사하니 내가 물속에 전락한 장소는 혜화동 石橋이었고, 내가 얹히어 있던 그 사구는 현 서울대학을 지나서인 어느 한 곳에 급류 격랑에 복새흙이 밀리고 밀리어 형성된 한 小丘였던바, 천우신조 나는 표류타가 그 위에 얹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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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천황 히로히토의 종전 조서(終戦の詔書) 2014.08.14 09:54:57

台植案 : 아래는 畏友 윤소영 선생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글을 전재한다.  

https://www.facebook.com/notes/%EC%9C%A4%EC%86%8C%EC%98%81/%EC%9D%BC%EB%B3%B8%EC%B2%9C%ED%99%A9%EC%9D%80-1945%EB%85%84-8%EC%9B%94-15%EC%9D%BC%EC%97%90-%ED%95%AD%EB%B3%B5%ED%96%88%EB%8A%94%EA%B0%80/550461585080968  

일본천황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했는가?
2014년 8월 14일 오전 8:41

1945년 낮 12시에 있었다던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은 무슨 내용이었을까요?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늘, 한번 일독해보시길 권합니다.

놀라운 것은 결코 “항복한다”는 언급은 없다는 것이지요. 연합국은 처음엔 독일처럼 엄격한 전쟁책임과 보상을 일본에게도 실시하도록 강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소련 인근의 국가들이 잇달아 공산화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아시아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보다 공산국가의 방어벽으로서의 미일동맹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아래 일본천황의 ‘조서’에서 보듯이 ‘항복한다는 인식’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거듭되는 망언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네요.

종전 조서 번역문(終戦の詔書)

짐(朕)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帝國)의 현상에 비추어 특별한 조치로 시국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충실하고 선량한 신민(臣民)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짐은 제국정부에게 미영중소 4개국에게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했다.

애당초 제국 시민의 강녕을 꾀하고 만방 공영의 기쁨을 나누는 것은 황조황종(皇朝皇宗)의 유훈으로써 짐이 늘 소중히 여겨 온 것이다. 일찍이 미영 두 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이유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희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다른 나라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입하는 것은 원래 내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쟁은 이미 4년이 지나고 짐의 육해 장병은 용감히 싸우고, 짐의 백관들은 힘써 소임을 다하고, 일억 신민은 봉공하는 등, 각각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상황은 반드시 호전되지 않고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그 뿐 아니라 적(敵)은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이들을 살상하니, 이 참상이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또한 교전을 계속하는 것은 마침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도 파괴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어찌 많은 신민을 보호할 수 있으며 어찌 조상의 신령께 용서를 빌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짐이 제국정부에게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이유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시아 해방을 위해 협력한 여러 동맹국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임무에 종사하다가 순직하고, 그리고 남은 유족을 생각하면 내 몸이 찢기는 듯 하다. 또한 부상을 입거나 재난을 당하고 집과 생업을 잃은 자를 생각하면 매우 가슴이 아프다.

생각해보면 앞으로 제국이 받아야할 고난은 분명 심상치 않을 것이다. 짐은 신민의 충정을 알고 있지만, 짐은 시운(時運)이 향하는 곳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을 감당하고, 참기 어려운 부분을 참아내어 만세토록 태평한 세계를 개척하고자 한다.

짐은 이에 국체(國體)를 호지하여 충량한 신민의 충성에 의지하고 늘 신민과 함께 있을 것이다. 만일 감정이 격해져서 함부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시국을 어지럽게 하여 큰 뜻(大道)을 그르치고 세계에 신의를 잃는 행위를 하는 것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

부디 국가 전체에서부터 한 집안의 자손에게 까지 전하길, 굳게 신주(神州)의 불멸을 믿고 맡은 바 임무를 중히 하고 먼 곳을 내다보며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공고히 하여 맹서하기를,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여 세계의 진운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신민은 나의 뜻을 잘 명심하라.

종전조서 원문

朕深ク世界ノ大勢ト帝國ノ現状トニ鑑ミ非常ノ措置ヲ以テ時局ヲ收拾セント欲シ茲ニ忠良ナル爾臣民ニ告ク

朕ハ帝國政府ヲシテ米英支蘇四國ニ對シ其ノ共同宣言ヲ受諾スル旨通告セシメタリ

抑ゝ帝國臣民ノ康寧ヲ圖リ、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皇祖皇宗ノ遺範ニシテ、朕ノ拳々措カサル所、曩ニ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庶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然ルニ交戰已ニ四歳ヲ閲シ朕カ陸海將兵ノ勇戰朕カ百僚有司ノ勵精朕カ一億衆庶ノ奉公各ゝ最善ヲ盡セルニ拘ラス戰局必スシモ好轉セス、世界ノ大勢亦我ニ利アラス、而已ナラズ加之敵ハ新ニ殘虐ナル爆彈ヲ使用シテ頻ニ無辜ヲ殺傷シ慘害ノ及フ所眞ニ測ルヘカラサルニ至ル

而モ尚交戰ヲ繼續セムカ、終ニ我カ民族ノ滅亡ヲ招來スルノミナラス延テ人類ノ文明ヲモ破却スヘシ、斯ノ如クムハ朕何ヲ以テカ億兆ノ赤子ヲ保シ、皇祖皇宗ノ神靈ニ謝セムヤ、是レ朕カ帝國政府ヲシテ共同宣言ニ應セシムルニ至レル所以ナリ

朕ハ帝國ト共ニ終始東亞ノ解放ニ協力セル諸盟邦ニ對シ遺憾ノ意ヲ表セサルヲ得ス、帝國臣民ニシテ戰陣ニ死シ、職域ニ殉シ、非命ニ斃レタル者及、其ノ遺族ニ想ヲ致セハ御身爲ニ裂ク且戰傷ヲ負ヒ災禍ヲ蒙リ家業ヲ失ヒタル者ノ厚生ニ至リテハ朕ノ深ク軫念スル所ナリ

惟フニ今後帝國ノ受クヘキ苦難ハ固ヨリ尋常ニアラス爾臣民ノ衷情モ朕善ク之ヲ知ル然レトモ朕ハ時運ノ趨ク所、堪ヘ難キヲ堪ヘ忍ヒ難キヲ忍ヒ、以テ萬世ノ爲ニ太平ヲ開カムト欲ス

朕ハ茲ニ國體ヲ護持シ得テ忠良ナル爾臣民ノ赤誠ニ信倚シ常ニ爾臣民ト共ニ在リ、若シ夫レ情ノ激スル所濫ニ事端ヲ滋クシ、或ハ同胞排擠、互ニ時局ヲ亂リ爲ニ大道ヲ誤リ信義ヲ世界ニ失フカ如キハ、朕最モ之ヲ戒ム

宜シク擧國一家子孫相傳ヘ、確ク神州ノ不滅ヲ信シ任重クシテ道遠キヲ念ヒ總力ヲ將來ノ建設ニ傾ケ道義ヲ篤クシ志操ヲ鞏クシ、誓テ國體ノ精華ヲ發揚シ、世界ノ進運ニ後レサラムコトヲ期スヘシ、爾臣民其レ克ク朕カ意ヲ體セ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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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창동 유적 학술조사 연혁 2014.07.22 17:49:45

광주 신창동 유적 학술조사 연혁

 

o 1963년: 옹관묘 53기 조사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o 1992년: 저습지 1차 조사 (국립광주박물관) → 국가사적 제375호 지정

o 1995년: 저습지 2차 조사 (국립광주박물관)

o 1997년: 저습지 3차․4차 조사 (국립광주박물관)

o 1998년: 저습지 5차 조사 (국립광주박물관)

o 1998년: 사적지 확대지정 시굴조사(국립광주박물관)

o 2002년: 옹관묘 3기 조사 (국립광주박물관)

o 2005년: 원형주거지, 환호 등 확인 (국립광주박물관)

o 2009년: 저습지 조사 및 삼국시대 주거지 등 확인 (국립광주박물관)

o 2010년: 수로, 구, 토기생산유구 등 확인 (국립광주박물관)

o 2011년: 수혈, 구, 삼국시대 주거지 등 확인(국립광주박물관)

o 2013년: 저습지 및 계곡 확인(국립광주박물관)

o 2014년: 계곡 확인(국립광주박물관) → 현재 14차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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