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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프로의눈] 상식 혹은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정신의 현창을 위하여
사진작가 김수남 약력 2015.01.28 08:01:04

김수남 작가 약력 

1949년 제주 출생
1967년 연세대학교 입학, 연세춘추(학교신문)사 입사, 인영회(사진반) 입회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 입사, 결혼
1977년 장남(기증자 유족 대표, 김상훈) 출생
1979년 차남(김재훈) 출생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 퇴원 후 죽음을 의식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
1981년 『공간』지에 「전통의 현장」 연재 시작(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내림굿, 제주 배연신굿, 함경도 망묵굿 등)
1982년 「한국의 굿」 사진 제작, 이 때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열화당에서 출판 제의(전 20권)
1983년 『한국의 굿』 출간(『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 및 기념 사진전 개최
1985년 동아일보 사직, 동아일보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
1985년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주도 촬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 출간
1986년 『한국의 굿』으로 제 13회 「오늘의 책」 수상,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3권 출간(평민사, 『풍물굿』 1권, 『호미씻이』 2권, 『장승제』 3권), 『옹진 배연신굿』 출간
1987년 『강릉 단오굿』(열화당) 출간, 『제주바다와 잠수의 사계』(한길사) 출간
1988년 『韓國心の美』 출간(일본 도쿄), 『한국의 탈․탈춤』(행림출판) 출간,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수상, 일본 촬영(日本の山と海祭り) 시작
1989년 『강사리 범굿』, 『제주도 신굿』, 『양주 경사굿 소놀이굿』, 『통영 오귀새남굿』, 『서울 당굿』 출간, 『빛깔있는 책들, 팔도굿』(대원사) 출간
1989년 중국 촬영 시작
1990년 중국에서 간첩으로 잡혀 조사, 재판에서 벌금형으로 모든 필름 몰수 후 섣달 그믐날밤 풀려남
1990년 『조상제례』, 『전통상례』(대원사) 출간, 연세대학교 강사 「사진촬영과 감상」 강의(1990~1997)
1992년 『안동하회마을』(대원사) 출간
1993년 『황해도 거제도 별신굿』, 『위도 띠배굿』, 『지노귀굿』, 『서울 진오귀굿』(열화당 출간), 「한국 현대사진, 관점․중재」 그룹전, 사진집 『濟州道』 3권 출간(國書刊行會, 일본 도쿄)
1995년 「히가시가와(東川) 사진상」 해외작가상 수상, 수상 기념 사진전 「한국의 무속」 개최, 김수남 사진전 「아시아의 하늘과 땅」 개최 및 사진집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출간
1996년 『아시아의 하늘과 땅』으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
1997년 김수남 아시아 문화탐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석필) 출간, 「삶의 경계」 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참가
1998년 「Schamaninnen in Korea」전 참가(함부르크 박물관, 독일)
1999년 김수남 사진전 「살아 있는 신화 ASIA」 개최, 『살아 있는 신화 ASIA』(연세대 박물관) 출간,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 대학원 강사(1999~2000)
2002년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역임, 방송통신대학교 교재 『여가와 삶』 사진부문 「사진찍기와 자기표현 또는 자기발언」 저술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 위출혈로 수술
2004년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출간, 『한국의 굿』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품될 ‘한국의 책 100’에 선정, 2004 아시아 전토예술 페스티벌 「신의 얼굴」 전시 개최
2005년 「빛과 소리의 아시아」 전시회 개최(인사아트센터), 「Schamaninnen in Korea」 개인전 개최(베를린 Werkstatt Der Kulturen), 사진집 『굿-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출간, 영문판 사진집 『Gut-Shamanic Ritual Ceremony』(열화당) 출간,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전시 개최 및 사진집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출간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 김수남기념사업회 창립, 옥관문화훈장 추서
2007년 「김수남 사진굿 魂」 전시 개최(이사아트센터), 『김수남 사진굿 魂』(현암사 출간), 사진집 『김수남』(김수남기념사업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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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풍납토성 보존관리안 발표에 대한 서울시 입장 2015.01.27 08:36:46

문화재청의 발표는 문화재도 주민보호도 포기한 것.

5년 내 ‘조기보상’으로 해결하자

- 문화재청의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변경에 관한 서울시 입장 -

- 주민보호 측면에서도 기대감만 부풀리는 미봉책
- 2천년 한성백제 유산에 대한 심각한 위협,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난망
- 서울시와 협의 중 일방적 발표 유감 

문화재청이 지난 8일 발표한「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변경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 풍납토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음. 세계유산 등재도 난망해짐.  

주민보호 측면에서도 문화재법 절차에 따라 발생하는 상당한 비용과 기간을 고려한다면 주민부담 등 어느 하나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기대감만 부풀리는 미봉책으로, 문화재청이 이를 철회하고 특단의 재원대책을 통해 향후 5년 안(매년 20%)에 2·3권역을 조기 보상할 것을 강력히 제안함.  

서울시는 현재 재정여건이 녹록치는 않지만 조기보상을 위한 특단의 재원 확대를 강구하겠음. 이는 서울 2천 년 역사의 사실상 출발 지점인 한성백제 유산을 굳건히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시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임.  

후손에게 물려주고 세계와 함께해야 마땅할 한국 고대사를 당장의 예산 부족을 이유로 돌이킬 수 없이 훼손시켜서는 안 되고, 장기간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주민에게 너무 큰 고통인 만큼 주민과 문화유산을 동시에 보호하는 근본대책은 조기보상밖에 없다는 판단임.  

서울시는 문화재청이 발표한 변경계획은 문화재보존과 주민보호 차원에서 공히 타당성과 실효성을 결여해 보상도 개발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판단함.  

첫째, 추가적인 재원대책 없이 보상권역을 2, 3권역에서 2권역으로 축소하는 것만으로는 보상기간 단축효과가 미흡해 20년이 지난 후에나 발굴이 가능함. 마찬가지로 주민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임. 2권역 우선 해결이라는 발표내역이 무색하다는 결론임. 

둘째, 3권역의 경우 보상에서 제외하고 15m 건축높이 제한을 서울시 도시계획조례(2종, 7층:21m)와 일치시켜 주민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는 최소한의 문화재 보호원칙과 기준을 결여한 조치. 3권역에서 사실상 이런 규제완화가 가능한 지역은 현행규정상 총 1,129필지 중 54필지(약5%로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함.  

① 문화재보호 측면 : 문화재 보호목적의 높이 기준을 도시계획에 따라 정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국가사적지역 내 문화재보호법 배제 선언과 마찬가지. 문화재 특성에 따라, 문화재보호법 체계에서 정해야 함. 풍납토성은 지반이 연약한 하천퇴적층이므로 지하 2m이내 굴착제한을 유지하면서 7층을 건축할 경우 토지 내 압력으로 인한 지하유적층 훼손 개연성에 대한 기술적·종합적 검토가 필요함. 

② 주민보호 측면 : 높이규제를 완화해도 건축기준 등에 따른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7층(21m)까지의 건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음으로써 과도한 기대와 혼란을 초래하고 있음. 3권역 주민들은 보상에서도 제외되고 건축완화의 효과도 매우 제약됨으로써 또 다른 피해가 우려됨.  

즉 이 방안은 2‧3구역 공히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임. 

셋째,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작년 말부터 재원확대를 통한 조기보상 방안과 3권역 규제완화 방안에 관한 이견조정을 위해 협의를 진행 중에 있었음. 실현가능성 검토를 위한 전문가 회의도 개최한 바 있음. 그럼에도 문화재청이 서울시와 합의되지 않은 이번 계획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함. 

문화유산은 한 번 파괴되면 되돌리기 어렵고 복원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점에서 제대로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 특히 백제의 전체 680년 역사 중 500년 가까운 기간이 한성백제의 역사이며 한성백제는 2000년 서울 역사의 출발지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문화교류의 중심축임. 오는 6월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이와 연계한 ‘확장 등재’를 통해 대한민국과 서울이 세계적인 문화국가, 역사문화도시 발돋움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가 마련됨.  

서울시는 이러한 이유로 문화재청에 변경계획 철회를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촉구하며, 3권역의 경우 규제완화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주민들에게 실망과 혼란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 만약 재검토결과 3권역 규제완화가 적절히 않다면 3권역을 포함해 획기적 재원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임. 

국가도 서울시도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임. 그러나 지난 수 십 년 간 고통을 겪었고 앞으로도 겪게 될 주민들을 보호하고 우리가 지향해온 문화국가, 역사문화도시로서 백년대계를 마련하기 위해 이러한 결단과 투자는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것이 서울시의 믿음임.  

2015. 1. 15.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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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 1854~1919) 2015.01.12 15:08:27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 1854~1919)


근대기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이면서 미국 워싱턴 D.C. 소재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프리어갤러리(The Freer Gallery of Art) 창립자이다.

1854년 뉴욕주 킹스턴Kingston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학교를 떠나 시멘트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철도회사에 회계원으로 들어갔다. 26살 때인 1880년 디트로이트에 정착한 프리어는 그곳에서 철도 차량 제작업체를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모았다. 20세기 벽두가 되면서 사업에서 은퇴한 뒤에는 여생을 아시아 미술과 미학운동(The Aesthetic Movement)의 미국 미술품 수집에 열을 투신했다. 그의 포부를 그 자신은 “다양한 시기에 제작되어, 여러 양상으로 서로 조화롭게 연계된 미술품을 한데 모으는 것”(to gather together objects of ars covering various periods of production, all of which are harmonious and allied in many way)라고 말했다. 그의 컬렉션 가치에 대해 프리어 자신은 “미(美)의 높은 이상을 증진하는 일”(the promotion fo high ideals of beauty)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렇게 모은 컬렉션을 프리어는 미국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따라 스미소니언박물관은 프리어와 몇 차례 협상을 거치고 당시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선 아래 프리어 컬렉션을 인수한다. 다만, 프리어는 그 생전에는 소유권은 여전히 자신이 갖기로 했다. 이에 따른다면 프리어는 생전에는 ‘기탁’ 형식으로 컬렉션을 넘겨준 것이며, 그 자신의 사망과 더불어 ‘기증’을 한 셈이다. 이런 협정에 따라 프리어는 계속 그의 컬렉션을 늘려갔다. 그 결과 기증 당시 2천500점인 컬렉션은 그가 사망한 1919년에는 거의 네 배로 늘어났다. 사망 직전 프리어는 유언장을 변경해 그의 컬렉션에 추후 스미소니언박물관이 수집하는 아시아 및 극동 미술품을 보강토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프리어 캘러리는 꾸준히 소장품을 늘리게 됐다. 프리어 갤러리는 1923년 찰스 애덤스 플랏(Charles Adams Platt)이 설계해 1923년에 문을 열었다. 이상 그의 생애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 발행한 《Korean Art in the Freer and Sackler Galleries》, 2012, 13~14쪽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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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 시대의 재림을 꿈꾸며 2015.01.04 07:55:51

문고본 시대의 재림을 꿈꾸며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이는 아래에 게재됐다. http://www.nl.go.kr/upload/nl/publish/201306/book-data/4.pdf 

출판 경향이라는 점에서 볼 때, 60~70년대 한국 출판계는 문고본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내 세대 사람들에게도 그런 문고 전성시대의 향취랄까, 여진은 남아 있다. 삼중당문고로 문학을 접했고, 을유문고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했으며, 그 외 무수한 문고가 있었다. 문고본은 주머니가 얄팍했던 가난한 학생에게 저렴한 가격에다 휴대의 편리함까지 주었으니 그 혜택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문고본 중 상당수가 여전히 서재 한 켠을 채우거니와, 나 같이 책이 많으면서도 더러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요즘 책이라면 하드커버 일색에 무겁기는 쇳덩이 같기 만한 것들은 그 어느 때보다 문고본 시대의 부활을 꿈꾸게 한다. 당시 문고본의 또 다른 장점 하나는 글자 그대로 포켓판이라, 직장인 양복 주머니에도 쏙 들어간다는 점이다.

한데 이런 문고본이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아예 종적을 감춘 듯하다. 이는 이웃 일본의 출판사정과 무척이나 비교가 된다. 출판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은 문고의 왕국이라 할 만하거니와, 국내에서는 그것이 멸종하다시피 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출판계의 큰 몫을 담당한다. 요즘은 엔화 가치가 곤두박질치는 듯하지만, 여전히 나같은 사람에게 일본 책은 비싸기만 하며, 특히 하드커버 책 구입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런 사정에서 일본 문고본은 우리에게도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인 데다 그것이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고 학술적 깊이 또한 하드커버 판에 못지 않아 일본에 갈 때면 늘 이런 문고본을 사오곤 한다.

국내 출판가에서도 근자에 몇몇 출판사를 중심으로 문고본의 부활을 꿈꾸는 조짐이 있다. 실제 두어 출판사에서 시도하는 문고본 시리즈는 출판가와 독자 양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분명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체감하는 불만은 적지 않아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해 볼까 한다.

요즘 식당에서는 조그맣게 돌돌 말린 물수건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엄지손가락만한 이 물수건은 물을 부으면 부풀어 올라 물수건이 되는데, 나는 문고본과 일반 단행본 또한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문고가 아무리 판형이 작고 원고 분량이 단행본에 비해 적다 해도, 그것이 응축한 내용과 문제의식은 단행본에 못지않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즘 국내 문고본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마치 물을 부어도 좀체 늘어나지 않는 물수건 같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

나는 문고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이런 문제가 비롯된다고 본다. 문고본과 일반 단행본을 비교할 때 전자는 후자를 발췌하거나 축약한 판형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체로 출판사도 그렇고, 원고를 작성하는 필자 또한 이상하리만치 문고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곤 한다. 요즘 인문학 쪽 기준으로 학술지 논문은 대체로 분량이 100~150매다. 한데 작금의 문고본은 이 논문을 적당히 분량만 늘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준다. 문고는 논문으로 작성하기에는 좀 길고, 일반 단행본으로 엮기에는 분량이 적은 어중간이 아니다. 문고는 엄연히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또 다른 단행본이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60~70년대를 구가한 문고의 재판 현황과 지금의 현황을 비교했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 실례는 제시하지 않겠지만, 당시의 문고 중에 요즘 일반 신국판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책이 더러 있다. 문고본이 문고본으로 재탄생하지 못하고 왜 판형이 바뀌어야 하는지 안타깝지만,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 이유는 차치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대목은, 과거의 문고본은 그렇게 새로운 판형으로 갈음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량이 요즘의 일반 단행본 못지 않아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당시의 문고가 또 다른 단행본으로 기획됐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기에 그것을 새롭게 조판하고 판형과 글자를 키운다 해도 이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 문고 중에서 반성해야 할 대목은 발췌가 많다는 점이다. 애당초 그 자체로 완결품이었을 전체에서 일부만을 뚝 떼어내 문고본에 어울리는 크기의 분량으로 줄인 사례가 너무 많다. 이는 동서양 고전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데, 예컨대 원본 전체 분량이라 해 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논어나 노자조차도 어떤 문고본에서는 그 일부를 잘라내어 문고본을 만든다. 원전 잘라내기 현상은 큰 부피의 고전으로 옮겨가면 더욱 극심해져 심지어 어떤 문고본은 원전의 10분의 1을 감량한 것도 있다. 이로 볼 때 문고본을 출간하는 국내 출판가에서, 문고는 반드시 한 권 단위로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고는 이런 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문고본으로는 분량이 부담스럽다면 2, 3권으로 분책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축약이나 발췌가 아주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의 문고본이 내재한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대목은 판형이다. 나는 문고본이 포켓판과 반드시 같은 개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내게 익숙한 문고본은 포켓판이었다. 포켓판은 양복 호주머니에 부담없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요즘 문고본 중에도 이런 포켓판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것은 그것을 집어넣으면 호주머니가 찢어질 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왜 우리의 문고본에는 하드커버나 준()하드커버 판형이 그리 많은지도 모르겠다. 내지가 너무 뻣뻣해 굽히기 심히 곤란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표지까지 하드커버를 씌워놓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새로운 문고본의 시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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