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하는 일을 알고 있음에도 친구 녀석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가득이다.
서운함을 다독여도 될 일을, 굳이 약자 운운하며
녀석의 서운함에 서글픔까지 얹어버렸다.
지난 추석 때 근 10년만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이젠 서로가 그리워질 만한 나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리움보다 더한 절실함이 모두 훌쩍 넓어진 이마만큼이나 깊고 넓었다.
추석 이후 몇 번을 더 만났고
지난 금요일 밤에는 4명의 친구들이 모두 가족을 대동하고 만났다.
망년회를 겸한 송년 모임인 셈이었다.
물론 여전히 홀몸인 나는 회비마저도 절반 할인 혜택을 받았다.
대신 녀석들이 주로 모여 사는 일산으로 마실 떠나는 불편함은 감수했다.
한 녀석은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지금은 민간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군인 기질이 다분한 녀석이다.
녀석은 지난 한 주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평택에서 순직한 소방관 관련 사진에
그 며칠 후 훈련기 추락으로 목숨을 잃은 공군 조종사 이야기를 꺼냈다.
단순한 얘기였다.
왜 소방관 순직 관련 사진은 주요 신문 1면에 등장하는데
순직 조종사 사진은 1면에 나오지 않았는가?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소방관도 마찬가지겠지만
조종사들도 정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그런 이들의 죽음에 사회는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나는 그런 친구의 말에 받는 돈의 많고 적음으로 응대해버렸다.
아무래도 소방관이 조종사보다는 사회적 약자가 아닌가.
그런 약자에게 조금 더 애정을 보여준 것이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었던 말이 아니었다.
그저 툭 하고 터져 나온 말이었다.
녀석은 아무래도 억울했나 보다.
정말 조종사 고생한다는 말을 더 하고 싶었나 보다.
술에 녹아 더 이상 오간 이야기는 없지만
술로도 녀석의 서운함은 사라지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녀석은 지난 만남에서
중학생인 아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싶어한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런 녀석인데 아무래도 내 대답은 적절하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어떤 죽음이 값지고 어느 죽음은 가볍다 말할 것인가.
그저 모두 살아 자신의 길에 의미를 부여하며 선종하는 것이 기쁨 아니던가.
미안하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