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홈연합 블로그 홈블로그홈  l 로그인
에움길에 서고픈~<이광빈>
http://blog.yonhapnews.co.kr/crazybin/
[기자세상] 이광빈 블로그 (여가)
이전달 2014 7 다음달 30 수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카테고리
최근포스트
최근코멘트
최근방문자
포스트 : 10
코멘트 : 23
트랙백 : 28047
방명록 : 32
방문자 : 358764
오늘 : 97
RSS구독 RSS 2.0 (?)
Comment RSS 2.0
박영석 대장님, 고마웠어요, 사소한 이 한마디 못했네요~~ 2011.11.01 17:21:21

2005년 2월. 박영석 북극원정대의 한라산 훈련길에 동행했다.
북극점 당도 1보를 위해 몇개월간 박 대장과 친밀한 관계를 쌓으려고 애쓰던 상황이었다. 한라산 훈련길도 이 같은 과정의 일환이었다. 박 대장의 요청이기도 했지만 눈 덮힌 한라산에 한번 가보가자 하는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한라산에 가기 일주일전, 박대장과 기사와 관련해 언쟁을 벌였다. 그러다보니 한라산행 자체가 껄끄러웠다. 감정의 앙금이 남았는지 박대장도 '오든말든' 분위기였다.
고민고민하다가 토요일 아침 김포공항으로 나섰다. 거의 오기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식의.. 그땐 기자 초년병이라서 꽤 괄괄했던 시절이었다.
박대장의 얼굴에는 '안올줄 알았는데'라고 써있었다. 오희준 대원만 "그렇게 산에 올라가면 쉽게 피곤해져요"라며 신발끈을 고쳐매주었다.
100키로의 썰매를 매고 대원들은 한라산 등반을 시작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산행을 시작한 지 몇시간이 흐르자 대원들의 발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해는 점점 기울어져갔다.
상황상 SBS 젊은 PD는 의지와 달리 어쩔 수 없이 썰매를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네다섯시간 정도 밀다보니 허리가 끊어지는 듯했다.
저녁 10시께나 목표지점인 용진각에 도착했다. 맨몸으로 서너시간이면 당도할 산행이 10시간 이상 걸린 셈이다.
박 대장은 텐트 안에서 "이기자 보기와 다르네"라고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모 신문 취재기자와 사진기자가 취재거리만 챙기고 먼저 올라간 것과 비교되서인지 SBS PD와 난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날 꽤 마신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달 후 북극점에서 박 대장이 위성전화를 걸어왔다. "이기자, 나야~, 도착했어"
이후 몇번 개인적 교류가 있었지만,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엄홍길, 한왕용 대장이 편했다. "사나이는 의리야"라고 '사나이'와 '의리'라는 단어를 중시하던 박 대장과는 뭔가 맞지 않았다.
출입처를 옮기고 박 대장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으나, 다음해 여름 휴가를 뉴질랜드로 가면서 간접적인 인연이 이어졌다.
안나푸르나에서의 기억을 못잊어서인지 히말라야로 간단한 트레킹을 가려고 했으나 회사 휴가로는 무리였다. 대안으로 선택한 곳이 뉴질랜드였다. 희준이형이 며칠 가볍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고 추천해줬다.
휴가 1주일 전이어서 원래 불가능했지만 희준이형이 뉴질랜드에 사는 산악인 선배를 통해 캠퍼밴 예약을 대신 해줬다. 그리고 뉴질랜드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박 대장 부인이었다.
오클랜드에 도착해서 캠퍼밴을 인수한 뒤 박 대장 부인이 운영하던 한국식당으로 향했다.
희준이형이 박 대장을 통해 미리 손을 써둔 덕에 환대를 받았다. 박 대장 부인은 자고 아침에 출발하라고 권유했지만, 민폐 끼치기 싫어서 동기 송광호와 함께 깜깜한 뉴질랜드의 고속도로를 덜덜거리며 달렸다.
그러나 박 대장 부인이 싸준 반찬은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귀국해 박 대장에게 감사인사라도 전해야지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박 대장과의 인연은 완전히 끝난 듯했다.  연결고리였던 희준이형은 2006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깃들었다.

아침에 박 대장의 위령제 소식을 접했다.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고마웠어요"

코멘트(3)     트랙백(2094)
'연아 사진소동' 이제는 말할 수 있다(4년만의 블로그질) 2010.03.04 16:27:39

(위 사진은 아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지난해 12월초. '피겨퀸' 김연아가 일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대회에서 우승한 날 편집국에서 오랜만에 숙직을 하고 있었다. 마감뉴스를 보고 새벽 2시께 '라꾸라구'에 몸을 의탁했지만, 환경이 꿉꿉한 탓인지 한시간 가량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잠든지 몇십분 지났을까, 편집국에 전화벨이 맹렬히 울리기 시작했다. 스포츠부 전화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들자 젊은 여성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한모 기자가 우리 연아 사진을 어떻게 그렇게 찍을 수 있어요. 이게 말이 돼요? 당장 안내리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뜨악했다. '무슨 일이지' 순간 한 선배가 스포츠 스타들의 경기중 찌그러진 얼굴을 찍어 유명세(?)를 탄 기억이 떠올랐다. '점프하다 찌그러진 연아 얼굴이 앵글에 잡혔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라꾸라꾸에 눕자마자 전화벨이 다시 맹렬히 울리기 시작했다. 거의 스포츠부 모든 전화에서 벨이 울리고 있었고, 인근 부서의 전화기들도 함께 몸부림치고 있었다. 몇 통을 연달아 받았는데, 울먹이면서 몰아붙이는 김연아 팬들을 잠재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사진부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전화벨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고, 사진부 당직자가 응대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사진부에서 김연아 팬들이 항의한 사진을 보니, 저널리즘 관점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됐다. 연합뉴스 뿐만 아니라 다른 해외 통신사도 거의 비슷한 사진을 발행했다. 그러나 누리꾼 사이에서는 오해가 생기거나 논란이 빚어질 수도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부 당직자가 고민하다가 인터넷으로 사진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각 포털에 삭제 요청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20여분이 흘러도 사진은 그대로 포털에 떠 있고,김연아 팬들의 항의는 계속됐다. 새벽 시간대에 포털이 즉각 조치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두고볼 수가 없어서, IT기자로서의 연락망을 활용, 각 포털 홍보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즉각적인 조치를 부탁해, 연합뉴스가 포털에 보낸 사진이 내려지고, 블로그 등으로 퍼나르기된 사진에 대해 모니터링이 들어갔다. 새벽에 포털 관계자의 잠을 깨우기까지한 이유에는 '연아가 그 사진을 보고 실망해서 올림픽 훈련과정에 영향을 미치면 어떡하지'라는 지극히 단순한 '소극적 김연아 팬'으로서의 생각도 한몫했다. 구글 검색으로 잡히는 관련 사진까지 삭제되도록 조치하다보니, 어느덧 동이 텄다. 사진소동의 거의 잠을 못자고 다시 근무에 들어가게 된 셈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관련 사진이 아예 유포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모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일본의 한 잡지가 관련 사진을 실어 김연아에 대한 흠집내기를 하고 있다고 인터넷신문 연예기자가 단독보도했다'며 해당 기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내보내기도 했다. 대박 웃었다. 일부 누리꾼 사이에는 해당 사진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여신' 보호작전을 전국민적으로 펼치는지 다행히 별다른 논란이 되지 못하고 사그러들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삭제가 안됐더라도, 별다른 파장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도 당시 김연아 팬들의 격앙된 반응을 감안할때, 삭제가 안됐다면 다음날까지 편집국 전화기는 한참을 울어댔을거 같다. 하여튼 '김연아 포에버' twitter.com/crazybin95
코멘트(2)     트랙백(308)
인천 커피숍 자존심 '쁘띠아르' 2007.05.27 21:55:14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옆에 있는 커피숍 '쁘띠아르'입니다.
부암동 에스프레소 다방에는 못미치지만 착박한 인천문화의 '숨구멍'으로 평가받지요.
술약속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숨을 돌리곤 했지요. 인천에서 원두커피의 향을 그리워하시는 분들에게는 소금과 같은 곳일겁니다. 아프리카, 북.중.남미, 동남아 등지의 커피 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일부 기자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기도 한답니다.
다만 유흥가 끝자락에 있어 술취한 손님들이 가끔 와서 고성방가를 하는게 흠이지요.

코멘트(2)     트랙백(693)
그녀의 품 속은 따뜻했다 2005.10.28 11:34:02

10월 2일 안나푸르나 북면 베이스캠프. 꿈이 전개했던 영상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꿈을 밀어냈다. 사지를 통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신은 거의 돌아왔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 숨을 쉬어봤지만 호흡은 가빴고 머리속은 납덩이가 가득찬 듯 듯했다.  4천m  이상 지역에서 며칠 째 밤마다 호흡곤란으로 잠이 깨서 생경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심했다.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지난 봄  청소등반대가  다올라기리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기자가 급사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의 그림자가 감싸기엔 그리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산소  부족으로 뇌가 잘못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스쳐갔다. 헐떡이며 좁은 텐트밖으로 기어나갔다. 1m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텐트 밖으로 나가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10여분이 지나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팠던 머리도 조금 진정됐다.  차분해지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뿐만 아니었다. 안나푸르나의 은하수 아래 3~4명의 대원들이 숨쉬기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문제는 술이었다. 고소  적응이 어느 정도 됐을 법했을 때 가장 심한 호흡곤란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슬로바키아 원정대 캠프에서 70도짜리 술을 한잔 받아마신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힘든 기억의 전부다. 10여일간 산을 타다 호흡법이 잘못돼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도 찾아오고 고산병 증세로 산을 타는 도중 주저앉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별 것 아니었다. 신체에 위해가 될 상황은 아니어서다.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가 남겨준 영상 속에 끼어들기에는 너무도 보잘 것 없던 장면이었다.
그녀의 품 속은 너무도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숨결은 두려움으로 식어있던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녀의 속살도 너무나 투명했다. 그녀의 허리에 올라가기까지 깊은 계곡과 심한 굴곡은 숨을 헐떡이게 했다. 그 곡선 위에서 한발 한발 걸으며 그녀의 펼쳐진 모든 아름다움을 낱낱이 훑어보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네팔병이 든게 분명하다. 다시 히말라야로 떠나고 싶은 욕구가 살랑인다. 내년 휴가는 이미 친구와 히말라야 트래킹을 가기로 했다. 3천m 이상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처럼 전문가들과 같이 가는 것이 아니므로 고산은 무리일 테다. 물론 휴가 기간도 더 이상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고산에 대한 자신감은 생겼다. 무엇보다 체력에 비해 고산병에 강한 체질인 것 같아서다 . 일주일 이상 감지못해 기름름이 덕지덕지 붙은 머리도 다시 만져보고 싶다. 혹시 다음에 기회가 되면 6천m까지 오르고 싶다. 그때는 암벽등반도 배워가야 할 것이다. 6천m의 풍경이 어떤 감동을 선사할 지...
그곳에 같이 갔다온 분들에게 감사하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대원들한테 찍혔다. 그들의 눈에는 백면서생이 나타난 것이었다. "누구지?"  "기자래" "아~" 그리고 특별관리대상이 됐다. 올 봄 청소등반대에 동행취재온 기자가 고소를 먹어 일정이 하루 늦춰지고 생고생을 했기에 더욱 불안했을 법 했다. 등반을 갔다온 뒤 농담삼아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는 김덕환 약사는 항상 내 몸 상태를 주시했다. "기자는 꼭 올려보내야 돼"라며 등반 과정을 지켜봤다. 7천m까지는 능히 오를 히말라야 산꾼이 나 때문에 3천m 이상 지역에서는 후미로 처졌다. 문제가 생기면 빨리 조치를 취할 생각에서였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수천번 해도 모자를 분이다.  그밖에 한왕용 대장을 비롯해 텐트메이트 용석이형, 이성주PD, '여성 산악인'이라고 장남삼아 불렀던  한화정 형수님, 원호형, 빤스형님, 원용덕 선생님, 베이스캠프에서 기사 감이 안올 때 대금연주를 해주셔서 아이템을 떠오르게 했던 석자연 스님 등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 젊은 날 아름다운 기억 속의 등장인물로 잊혀지지 않을 것같다.
부지런을 떤다면 그때의 기억들을 앞으로 이 곳에 담아낼 것 같다.

코멘트(3)     트랙백(1856)
유쾌한 북한 영웅 계순희 2005.09.24 01:45:28

북한의 스포츠 영웅 계순희. 그가 금메달을 딸 때마다 북한은 퍼레이드를 한다.  그의 어머니가 북한tv에서 한 인터뷰가 연합 기사로 나갔을 정도로 남쪽에서도 관심이 많다. 남북의 스타이기에 대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기분 좋게 말이다. 
2005카이로 세계유도선수권대회. 한국 유도가 추풍낙엽일 때 계순희가 금메달을 땄다. '한국유도 전원 예선탈락'이라는 스트레이트 제목이 지겨워질 때 계순희 때문에 땀 좀 뺐다. 그리고 다음날. 북한선수단 대기실에서 두시간 가량을 노닥거리게 됐다. 운이좋았다. 북한의 서기장으로부터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특권(?)을 얻었다. 금메달을 품에 안아서인지 여유만만한 계순희는 일상복 차림으로 있었다. 한국 선수단 임원도 몇명 끼었다. 북한선수단하고는 해외 대회에서 이미 친숙해진 분들이었다. 
무엇보다 계순희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쾌한 처녀다. 이날 가장 많이 웃겼던 인물이었다.  
남측의 문원배 국제심판이 남남북녀로 대화를 이끌었다. 계순희보고 며느리 삼자고 했다.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계순희가 사진을 보더니 잘생겨서 안된다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며. 문 심판이 있으면 어떠냐면서 능력있는 남자의 척도는 여자가 많은 거라며 농을 쳤다. 
이번에는 계순희가 공격한다. 제주도 별장에 놀러오게 해준다면서 제주도 갔을 때 데려가지 않았다고(계순희가 대회 때문에 제주도에 왔었나보다). 문 심판은 삼언한 경비 때문에 접근도 못했다고 투덜댔다.
화제가 남쪽에서 연상연하커플이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흘렀다. 계순희에게도 연하 남자는 어떠냐고 누군가 물었다. 계순희는 "어떻게 동생하고 삽니까?". "말로라도 덤비기라도 하면 어떻게 봐줍니까? 그러면 권투해야죠(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주변에서 나와 계순희가 팔씨름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웃던 계순희는 팔을 걷어붙일 자세였다.
난 한마디로 거절했다. "남쪽 남자 망신 시킬 일 있습니까?"
계순희에게 전날 쓴 기사를 보여줬다. 남쪽 언론이 자신에 대해 크게 다루니 조금 신기한 표정이다. 서기장, 단장, 감독이 돌아가면서 기사를 꼼꼼이 읽어보았다. 다들 좋은 분들이었다.
마지막날 계순희는 베스트플레이어상을 수상했다. 이때 문심판이 농담을 한마디 건넸다. 
"순희야, 내가 너 상 만들어줬어"   
이 때 계순희는 웃으며 "아니 며느리 삼겠다는 분이 상 만들어주는게 당연한거 아넵니까?" 재치만점이었다.
박용성 두산 회장의 IOC 위원직이 걸린 선거도 끼어 있어 긴 출장이었다. 출장 말미에 지칠 때쯤  기억 속에 박아놓을만한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계순희한테는 마지막 남은 명함을 남겼다. 액자에 만들어서 걸어놓으라고 말하면서...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앞으로 계순희한테는 명함을 액자로 박아 놓았는지(^^;;;) 확인하고, 금강산 담배 준다고 하고서는 마지막날 나타나지 않고 도망쳐버린(?) 서기장한테는 끝내 금강산 담배를 받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아마 어려울 것이다. 다시 그들을 보기는. 2005년 9월 잠시동안의 기억을 소중하게 해준 이들이 고맙다.

코멘트(4)     트랙백(4706)
실향민 할아버지 2005.09.24 01:03:14

기사를 보다 보니 12차 이산가족상봉이 11월5일에 이루어진다는군요. 집안에 이산가족이 없어 지금까지 크게 느껴보지 못했는데.. 지난 7월말 동아시아축구대회를 취재할 때 만난 한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북한대표팀이 훈련을 벌인 서울월드컵보조경기장 밖에서 북한 선수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할아버지였습니다. 나이가 70세는 훌쩍 넘어보이셨는데, 꼿꼿이 서 계시는 게 기품이 있더군요. 마냥 보시는 분 같지는 않아보였습니다. 호기심이 옆에 가서 물어봤지요. 실향민이시더군요. 알고보니 82세. 그럼에도 말도 또렸또렸하면서도 조리있게 말씀셨습니다.  전에 무슨일을 하셨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될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1.4후퇴 때 내려오셨다고 하는데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오셨다고합니다.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가족을 수소문 해보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보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답니다. 이번에도 신청은 하셨는지...


 (서울=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 "저 선수들 중 고향 출신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북녘에 두고 온 동생들 손자뻘 될 것 같은데 설마 여기에 있는 건 아니겠지요."
    29일 북한남자축구대표팀이 훈련을 벌인 서울월드컵보조경기장. 나이가  지긋한
한 할아버지가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 82세의 실향민 김장석씨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 김씨는 28세인 지난 195
1년 1.4후퇴 때 강화도를 거쳐 인천으로 내려왔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 한 채였다.
    김씨는 이날 오후 서울월드컵공원에 산책을 나왔다가 보조경기장 주변에 경계를
서고 있는 경찰에게 우연히 북한대표팀의 훈련 소식을 듣고 몇 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5시께 북한남자대표팀이 보조경기장에서 훈련을 하자 김씨는 철조망  앞에
서 뒷짐을 진 채 훈련이 끝날 때까지 지켜봤다.
    "생각보다 체격이 좋네요.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훈련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까 경기장에 나가서도 경기를 구경하고 싶고 평양에서도
한번 경기를 관전하고 싶네요."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어느 팀이 승리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비겼
으면 하네요. 대신에 골은 많이 나면서 말이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백두산과 금강산 관광을 통해 북녘 땅을 바라보거나 밟을 수  있었다는  김씨는
아직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통일부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죽기  전에  한번
고향땅 흙이라도 만지고 싶네요."
    이제 100세가 넘는 부모님들은 돌아가셨겠지만 친척들의 소식들이라도 듣고  싶
다는 김씨.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은 못 듣고 있어요. 함경도로 이주했다는  이
야기도 들었는데 확인은 되지 않더군요."
    김씨는 "북한축구대표팀이 경기를 잘 치르고 부상 없이 북한으로 건강하게 돌아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대표팀 버스가 훈련장을 출발한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lkbin@yna.co.kr

코멘트(3)     트랙백(1170)
히말라야로 100일간 남편 보낸 아줌마 2005.07.18 12:07:37

지난 주 금요일 오전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아줌마 목소리가 들렸지요. 오전에 여자로부터 걸려오는 대부분의 전화는 특유의 가다듬어진 목소리의 홍보 관계자들인데 아줌마 목소리가 들려 조금 당황했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루팔벽 원정대 이성원 원정대장의 부인이었습니다. 원정대가 떠난 뒤 한번 전화 통화했던 적이 있었지요.  원정대가 새벽에 루팔벽 도전에 성공해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밟았다는 낭보를 전해주셨습니다. 원정대가 출국한 지 9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약간 떨리면서도 안도해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원정대가 성공했다는 것 보다는 이제 남편이 돌아온다는데 기뻐하는 것 같더군요. 94일간 지구의 지붕에 보낸 남편 때문에 마음을 졸였답니다. 원정이 3달 이상 끈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 가슴앓이를 했다는군요.  원정대 중에서도 이번 원정대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호기심에 물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자주 남편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원정을 떠나는 거 말리고 싶지 않으세요?" 물론 대답은 언제나 말린답니다. 그러나 막을 수는 없다더군요. "산에 안가면 죽을 것 같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안보내겠어요"  남편을 산에 보내면 가슴앓이도 해야되고 남편대신 생업(주유소 운영)도 책임져야하는 이중부담이 생기지만 어쩔 수 없답니다. 원정대가 떠날 때보면 가끔 '부인들의 심정을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휴먼원정대가 떠나기 전 엄홍길 대장의 부인과 애들을 보며 표정 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체념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이었습니다. 북극원정대가 떠나기 전 한 술자리에서 젊은 원정대원이 여자친구를  부르더군요.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에 대한 기사나 사진이 신문에 나온면 스크랩한다며 밝은 얼굴로 자랑했지만 결국 남자친구를 장시간 사지로 떠나보내는데 것에 힘들어하더군요. 어쨌건 오늘 이 대장 부인이 전화로 정상 공격조가 베이스캠프에 안전하게 합류해 하산하기 시작한답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한번 잡설을 풀어놓아보았습니다.
 
--  어딘가에서 긁어온 내용입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
진보주의 교육을 창시한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인 존 듀이...
그는 9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까지도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불타는 생의 이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90세쯤 되었을 때 한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심오한 사고는 당신을 어디로 이끕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산을 오르게 하지요" 기자는 의아해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등산 말입니까? 그것이 철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러자 듀이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산에 올랐을 때 또 다른 산에 오를 의지가 없는 사람은
생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산에 오르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연합뉴스 산악담당 기자가.. -


코멘트(4)     트랙백(9148)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5.07.12 21:06:12
왜 미래일까?’ 관객 몫의 화두
한 무 _ 배재대 교수 / 공연영상학

영화를 만들 때 홍상수는 고뇌한다. 영상이나 내용에서 그 흔적을 보는 일이 흔하다. 영화의 제목들이 모두 특이한 것도 그런 예다. 그가 만든 5편의 영화 가운데 <오! 수정>만이 조금 덜 까다롭다고 할까? 그러나 이 제목도 아주 만만한 것은 아니다. 쉽게 보면 수정은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그러나 그 <수정>은 보석(같은 여자)인 수정(水晶)으로, 또 섹스로서의 수정(受精)―남자의 정자를 받아들이는 여자―으로 번져나간다. 거기에 감탄부호 ‘!’가 붙어 있어 감탄할 만한 것이 위 셋 중 어느 것인지를 찾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오!’의 발음이 흡기(吸氣)인지, 또는 배기(排氣)인지 아는 것도 필요하다.


특이한 제목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돼지’나 ‘우물’에 눈독을 들이면 못쓴다. 하나의 은유로 보아야 된다. <생활의 발견>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의미가 묻어 있다. 선영과 경수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된다. 선영이가 여자 점쟁이로부터 발견한 것이 ‘생활’이다. 특히 남편에 대한 점괘를 관객은 유의해서 들어야 한다. 발견해야 할 생활을 점을 통해 얻는다는 일이 극히 냉소적이다.

<강원도의 힘>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가는 곳이 강원도다. 홀로든, 함께든, 서럽든, 기쁘든 그들은 가고 온다. 그러나 강원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이것이 바로 강원도의 힘이다. 이 무미건조한 제목은 실은 “산천은 의구한데 젊은이들아! 너희는 어쩌려는 것이냐?”고 묻는 말이다. 최근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역시 이 영화처럼 영화의 전체적인 맥을 짚어 주어야 알 수 있다.


부정의 둥지 틀기

제목의 겉 뜻을 언뜻 보면 이렇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틀들이 거의 부정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지적 세계에 대한 부정, 일상성에 대한 부정, 시제에 대한 부정, 첫사랑에 대한 부정(환상 배제), 여성의 정숙한 성에 대한 부정 등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 제목으로 빌린 아라공(Louis Aragon)의 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아라공의 시, <미래의 노래>는 여성 찬미가 지극하다. 그의 시에서 여자는 분명한 미래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내용은 분명히 여성 찬미와는 거리가 있다. 찬미가 아니라 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남자에게 선화는 후회와 이별을 다시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선화는 분명히 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제목은 일견해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가 아니다>로, “미래가 될 수 없다”는 부정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왜 여자가 남자의 미래란 말인가?

두 남자는 과거의 여자를 현재로 찾아간다. 미래란 쥐뿔도 없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문호가 “선화가 어디 갔을까?” 하는 중얼거림이 미래와 연결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미래’라는 개념에 비추어보면 너무 미미하다. 과거의 여자를 현재로 찾아가서 미래로 남아달라고 애걸하는 남자들에 대해 감독은 어이없어 한다. 그의 인터뷰를 들으면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 보다 확실해진다. “…억지로 분석해 보니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여기 없으니 낫싱(nothing)이고 남자 곱하기 낫싱하면 다시 제로이고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미래라면 다시 여자도 아무것도 받지 않는 거고…”


둥지 속 알 하나

그러나 홍상수가 하는 부정의 성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부정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읽어내야 한다. 그의 부정은 변증법적 부정이다.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부정이다. 더 높게 치켜세우면 불교의 중론(中論)에서 말하는 부정처럼 판단 자체의 부정, 독단적 사변에 대한 자각이자 반성으로서의 부정이다.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나 착각을 정화시켜 자각하게 만들기 위해 던지는 부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가 둘러치는 부정의 울타리에는 알을 품는 암탉 한 마리가 있는 셈이다. 한 개의 긍정의 알을 낳으려고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닭 말이다. 알 속에 감독이 숨겨 놓은 목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헌준과 문호가 7년 만에 만난 선화는 남자들의 분별과 치기와는 다른 정신적 성숙을 보여준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두 남자를 넓이로 어우른다. 그녀는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다. 남자들은 자기만의 첫사랑을 간직하고 기억하려 하지만 선화는 이를 무시한다. 두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것도 같은 날 밤, 자기 아파트에서다.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기적 소유를 무시한다. 남자들은 제풀에 꺾여 스스로 떠나지만 선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남자들이 매달린 개별성이 무시되고 생명의 씨앗을 품는 전체성과 연속성으로 남는 것이다.

선화는 생명을 나르는 어떤 수동성의 힘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과거나 현재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녀가 이미 미래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화두라면?

“내 영화의 제목은 불교의 화두와 비슷해서 멍하게 삶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감독이 한 말이다. 그는 화두(話頭)로 영화의 제목이 행세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화두의 중심 테마의 하나는 개체와 전체, 전체와 개체의 모순적 변증법에 대한 역동적 파악, 그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부정의 둑을 허물고 일순 긍정의 물줄기를 뿜어내는 엄청난 힘이 없으면 이런 자각은 어렵다. 화두로 던진 제목이라면 던지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전인적 기백이 차고 넘쳐야 한다. 감독이나 관객 대부분이 거의 선(禪)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화두를 서로 주고받는 일은 턱없이 힘겨운 일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분명 화두에 뿌리를 두는 것이라면 그 답은 관객 자신에게 관련되어 있다. 보는 사람들 자신이 마음 안에서 물음과 답을 진동시키고 끌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감독이 설명을 멈춘 “여자는 남자의 미래가 아니다”는 분명 답이 못 된다. 감독이나 주인공에게는 없는 미래라 하더라도 미래는 인간의 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객의 몫으로 남는 미래가 있다는 뜻이다.

관객의 몫이 되는 미래는 “아니다”나 “그렇다”의 어느 한 쪽일 수도 있고, 양쪽 모두가 될 수도 있다. 양쪽이라면 끝나지 않는 답,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답이다.
코멘트(0)     트랙백(13)
이종격투기에 비친 검투사의 잔상 2005.07.04 10:44:21

'이종격투기를 하는 사람과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왜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종격투기와 검투사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언론에서도 이종격투기를 검투사 경기와 많이 비교를 하지요. 그래서 이종격투기와 검투사 경기에 대한 단상을 글로 풀어봤습니다. 논점이 없는 글입니다. 기자로서가 아니라 이종격투기를 접해본 사람으로서 생각의 흐름을 적어봤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많을 듯합니다. 이 글이 이종격투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이종격투기에 비친 검투사의 잔상


이종격투기에서 검투사 원형 찾기


‘트라키아투사 파비우스여! 건투를 빈다. 바루카 뻗어버려라!’ 화려한 사전공연이 관중들을 즐겁게 한 뒤 웅장한 음악 속에 경기장 가운데로 등장한 전사들. 늠름하면서도 격렬하게 싸운다. 이에 흥분하며 주먹을 치켜든 관중들은 마치 자기가 무대에 서게 된 듯 착각하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한쪽에서는 누가 승리할지 내기가 벌어지고 있다. 여자 관중들 중 일부는 그들의 근육질 몸매와 강인함에 숨을 죽이며 뜨거운 시선을 보낸다. 


오늘날 규모가 큰 이종격투기 대회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고대 로마 시대 검투사 경기 분위기다. 비슷한 면이 있지만 차이는 크다. 로마시대 대중이나 검투사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2005년도 온다면 이종격투기와 검투사 경기의 비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경기 방식을 차치하더라도 경기의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종격투기에는 종종 검투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이종격투기 경기에서 로마시대 콜로세움(원형경기장)에서 벌어졌던 ‘검투사들의 혈투’가 종종 연상되기 때문이다.



이종격투기 마니아와 히포마니아


이종격투기 마니아. 최근 강력하게 부상하는 마니아 집단이다. 스포츠 마니아들 중에서 결집력이 상당히 높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종격투기의 인기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만 이종격투기 관련 카페가 1,000여개에 달하고 있다. 몇몇 카페에는 수십만의 회원이 등록돼 있다. 이종격투기 마니아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포털 사이트에서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이종격투기 기사의 조회수가 높은 이유도 이런 높은 관심도와 결집력에서 비롯된다. 격투기 웹진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제 이종격투기 기사는 포털 사이트의 한 편을 점령하게 됐다. 이종격투기 마니아의 충성도는 지난 1월 이경숙의원에 대한 공격(?)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경숙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영방송의 자회사인 KBS SKY가 이종격투기 경기를 방송하는 대해 지적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이종격투기 마니아들의 원성은 성난 파도처럼 이 의원의 홈페이지를 덮쳤다. 최근 한 리서치에 따르면 이종격투기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골프에 이은 인기스포츠로 조사됐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축구, 야구에 이어 3번째 인기스포츠에 올랐다. 국내에 도입이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이러한 인기 이종격투기의 급성장 비결에 전문가들은 이종격투기가 인간의 본능적인 전투 욕망을 대리 만족시켜준다는 점을 꼽는다. 여러 격투기 종목을 혼합, 재창조해 관중들의 흥미를 이끌 요소들을 버무려 놓은 점도 중요한 요소. 사회 변동의 부산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보편화되면서 기존 스포츠 외에 새로운 유형의 스포츠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히포마니아(hippomania). 생소하지만 이 용어는 고대 로마시대 검투사 경기와 전차경주에 병적으로 열광하던 관중들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로마 대중들은 검투사 경기가 열리는 원형경기장에서는 배고픔도, 귀족들로부터의 부당한 대우도 모두 잊었다. 거대한 경기장에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관중들은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구경거리에 넋을 잃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검투사가 나오면 환호작약하며 현실을 뒤로했다. 검투사 경기는 고달픈 삶에서 잠시 해방시켜주는 만병통치약이자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로마인들은 경기장에서 패자에 대한 생사여탈권도 쥐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집단적인 목소리와 손짓으로 얻어낸 생사여탈권은 황제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대중의 권력이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인들이 ‘막시무스’를 연호하며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 것은 영화적인 요소라고만 볼 수 없는 셈이다.


이러한 검투사 경기 인기에 이종격투기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대부분의 팬들에게 이종격투기는 취미생활이다. 팬들은 선수의 전적, 개성, 기술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전성기 때 검투사 경기는 로마 대중의 삶 그 자체였다. 중독성 강한 마약이 펼쳐준 환각의 세계와 같았다. 경기를 보는 동안 그들의 손에 빵이 없다는 것, 자신의 농토가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은 묻어두고 말이다. 검투사 경기에 중독된 만큼 로마 시민들에게 검투사들의 성적도 중요했다. 취미를 넘어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종격투기와 몰입 정도가 다르지만 성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비슷했다. ‘네로 양성소의 힐라루스는 14전 12승’. 원형경기장에 남겨진 낙서다. 검투사 경기에서 꼭 사상자가 쉽게 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의 우상이 얼마나 멋진 경기를 펼치면서 승수를 쌓는 것이 관심거리였다.



이종격투기와 검투사 경기 비교 


과거 검투사 경기와 지금의 이종격투기는 둘 다 사회 변화와 사회 자체를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종격투기에 대한 연구 논문도 나오기 시작했는데, 해체와 포스트모던이론을 분석틀로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종격투기의 가장 기본적인 성공 조건은 자본의 힘에 의해 설정된 상업주의 이미지다. 현실적으로 이종격투기의 가장 기본적인 성공 조건은 자본의 힘에 의해 설정된 상업주의 이미지다. 화려한 조명과 음악, 선정적인 라운드 걸, 그리고 오프닝 쇼. 경기 자체도 경기 규칙과 요소에 있어 상업주의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는 배제시킨다. 이밖에 일원화된 가치 체계의 붕괴와 다양한 가치체계의 확산. 국가와 민족 경계의 허물기. 민족적 영웅보다는 개인적 영웅 만들기, 인터넷과 글로벌리즘. 새로운 미디어 환경. 하이브리드(잡종)시대. 새로운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 스포츠와 오락의 경계가 무너진 스포테인먼트(spotainment). 이것들이 이종격투기가 대중들에게 침투한 이유란다. 어려운 말들이지만 일리는 있다.


물론 이 중에서 우리의 현실과 역행하는 부분도 있다. 국가와 민족경계의 허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학자들의 이런 논리는 최홍만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은 듯하다. 최홍만의 상품 가치를 집약하면 한국 민속 스포츠의 제왕 자리를 꿰차고 앉았던 거인이 일본이 중심지인 이종격투기의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을 초월한 거인이 아니라 한국의 거인이었다. 지난 3월 K-1 서울 대회를 앞두고 독도 문제가 터졌다. 그리고 ‘최홍만! 독도를 지켜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상술이었다. 이후 언론도 대중의 관심도 최홍만이 일본 선수를 누르는데 집중됐다. 결과적으로 상술이 먹혀들지 않았지만 자본 앞에 민족주의는 이용대상이었다. 일본에 진출한 나머지 한국 선수들도 태극기에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는 한국인 피가 흐르는 혼혈이지만 외국 국적의 선수도 태극기를 휘날렸다. 이종격투기에 국가와 민족은 살아있었다. 그래도 민족과 국가도 결국 자본 힘 속에서 계산되어 나왔기 때문에 고도의 상업주의 전략이라는 이종격투기의 기본 틀은 깨지지 않았다.


이종격투기가 시대의 변화상을 설명한다면 검투사 경기는 로마시대의 사회상을 설명한다. 검투사 경기는 독보적인 국기이자 사회통합 수단이었다. 정치 입문과 정치 장악력을 위한 훌륭한 도구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관직에 출마하려는 사람이 노예끼리 피를 흘리는 싸움을 대중들에게 선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요가 많아지다 보니 흥행업자들도 생겨났다. 결국 검투사 경기는 로마에서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귀족이, 정치인들이 경기를 열지 않으면 국가가 열었다. 제국이 걷어 들이는 수입의 3분의 1은 원형경기장의 축제를 위해 쓰였다. 농토에서 쫓겨난 농민들의 ‘부자에게 돈을 내게 하라’는 외침은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게 아니라 검투사 경기를 선물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냉대를 검투사 경기로 날려버렸다.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구가할수록 검투사 경기는 더욱 시민들의 일상에 침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서는 1년에 230일 동안 검투사 경기가 열렸다. 일부 황제들은 경기의 지나친 확산을 우려해 축소하려했지만 권력의 안위를 위해 포기했다. 경기가 감소할수록 폭동이 증가해서다. 



검투사 경기와 이종격투기 잔혹사


검투사 경기는 점점 잔혹해졌다. 초창기는 단순한 일대일 승부였지만 검투사들을 경기장에 단체로 밀어 넣어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좀 더 색다르면서도 화려하고 규모가 큰 경기를 관중들이 점점 요구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사자 사냥, 코끼리들과 기병들 싸움을 원형경기장 내에서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원형경기장을 벗어나 호수에서 수천 명의 검투사와 노예들을 동원한 모의해전이 치러지기도 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에서는 로마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모의해전이 행해졌다. 전선 50척에 1천900여명의 노예들은 서로 나뉘어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는 국가적인 대사로 예산이 너무 많이 들었다. 사자와 같은 야수와 검투사의 싸움은 예산이 적게 들면서도 관중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랐다.


이종격투기도 마찬가지다. 이종격투기를 잔혹하다고 볼 순 없지만 점점 과격한 경기가 선호받고 있다. 서서히 종합격투기룰 경기가 입식타격 경기를 위협하게 됐다. 서서하는 경기보다 좀 더 레슬링과 유도 등의 기술이 접목되면서 누워서까지도 싸울 수 있는 방식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단적인 예가 일본의 프라이드의 K-1 추격이다. K-1이 종합격투기룰 대회를 지원하며 프라이드를 지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선 이종격투기의 저변이 늘어나면서 다양해진 기호 때문에 종합격투기룰이 뜨고 있다는 입장도 있다.



‘인기스타’와 ‘사회적 약자’라는 이중성


한 유명 이종격투기 선수는 말했다. 많이 다르긴 하겠지만 관중들이 이종격투기 경기에서 검투사의 비장미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겠냐고. 비장할 수도 있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과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비장미도 있겠지만 생계수단이므로 이겨야 한다는 각오도 덧칠해질 수 있다.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받는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종격투기 선수들은 직업만 놓고 봤을 때 사회적 약자다. 육체적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해서다. 일 년에 몇 번 열리지 않는 국내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대부분은 100만원 내외의 대전료를 받는다. 때문에 대부분은 격투기 도장 사범을 하거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검투사들도 사회적 약자였다.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검투사들은 시민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인기 검투사들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시민 신분을 회복하지 않는 한 대부분 검투사들은 노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신분제 사회에서 본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노예 신분에 갇힌 검투사들은 이종격투기 선수들보다 심리적 비루함은 덜했을 지도 모른다. 그 형태가 정당하든 그러지 않던 당시 사회에서 최고 인기를 끄는 경기의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종격투기 선수들은 사회적 편견에 항상 노출돼있다. 그래도 그들은 싸운다. 먹고살기 위해서일수도 있고 자기만족을 위해서일수도 있다. 최소한 검투사들처럼 불가피한 상황에서 억지로  싸우진 않는다. 

마치며

오늘날 이종격투기는 검투사 경기처럼 독보적인 국기가 아니다. 정치 입문의 수단으로 쓰이지도 않는다. 가난한 시민들의 고단함을 씻게 만들어 줄 수단도 아니다. 운 좋게 공짜 표를 구하지 않는 한 경기장에 오려면 입장권도 구매해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 피 흘리는 노예가 있었다면 이곳엔 자기 취미를 위해서나 돈을 벌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많이 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종격투기는 앞으로 몇 년간 유행했던 희한한 문화 현상으로 기록될지 아니면 21세기의 스포츠 키워드가 될지 모른다. 어쨌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정께 케이블 TV에서 방송되는 이종격투기가 꽤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고, 이종격투기 대회가 열리고 있고, 가끔 이종격투기와 관련한 사건사고가 대중의 눈길을 잡고 있는 현실이다. 싸우진   않는다. 

<위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코멘트(0)     트랙백(1866)
15년째 히말라야 찾는 전문의 임준 2005.07.01 19:05:12

 지난해 11월말이었습니다. 인터넷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임현담님의 홈페이지를 발견했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찬찬히 보다보니 그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기사거리라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호기심도 강했습니다. 지리산에서 하산하다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던 현담님은 처음에 인터뷰를 거절하시다가 결국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응하셨지요. 인터뷰를 갖다온 뒤 기사를 쓰려고 기자실로 갔습니다. 보통 때처럼 기사를 쓸 수 없겠더군요. 기자실 쇼파에서 30분 가량 뒹굴뒹굴 거리면서 구상을 했지만 별 소득 없이 불만족스럽게 기사를 쓰고 말았습니다. 예상대로 신문 전제가 한줄도 안됐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썼던 1천400여건의 기사 중 가장 소중합니다. 취재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고 파장력이 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사를 쓰는 동안 가슴이 따뜻했지요. 얼마 전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더니 술한잔 하자고 하시더군요. 조만간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자리를 기대합니다. 


<15년째 히말라야에서 삶의 의미를 구하는 전문의 임준>

"앞으로도 히말라야에 오르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현지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겠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히말라야의 산야에서 1~2개월씩 보내는 50세의 진단 방사선과 전문의 임준(필명 임현담).

    의사 생활을 하던 중 삶의 가치를 히말라야에서 얻고자 고행길을 자처한 지  벌써 15년째다.

    그는 히말라야가 품은 장대한 자연과 그 속의 사람들로부터 가슴 속에 전해오는 느낌을 글로 풀어냈다. 지금까지 펴낸 책은 '시킴 히말라야' 등 6권.

    올 봄 가르왈 히말라야(인도방면 히말라야)에 다녀온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www.himal.pe.kr)에 연재한 여행기를 내년 봄 책에 담을 예정이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자연에 대한 외경, 신에 대한 사랑, 가난이 주는 자유  등을 느낄 수 있단다.

    히말라야의 품 안에서는 번잡한 도심에서 질주해온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단다.

    "히말라야의 산 기운 속에 있으면 타자와 나, 자연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산길에서 하늘거리는 이름 모를 고산의 야생화, 눈을 돌리면 보이는 거대한  설산을 대하다 보면 진정한 자유가 느껴집니다."

    그는 마칼루 등 히말라야의 8천m급 산을 여러 번 탔지만 6천m 이상은  올라가지 않는다. 오른다는 것, 극한에 도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어서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맞이하는 자연과 사람, 문화의 내음새에  만취되는  것이 산행의 목적이다.

    산에서 만나 사람들과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금세 친근해진다는 그.

    올 봄 가르왈 히말라야의 한 산 봉우리 아래서 기타를 치는 젊은 남녀를 만났다.

    자칫 산마을 원주민으로 착각하기 쉬운 이들은 대학교를 다니다 인도로  떠나와 서 수년째 바람따라 다니는 20대 중반의 미국인 커플이다.

    "우리 나라 젊은이들도 일상의 번잡함을 떨쳐버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히말라야의 산에서 은행 퇴직금을  가지고 세계를 여행하는 우리 나라의 30대 여성을 만났는데 보기 좋더군요."

    그는 히말라야 산자락의 마을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해맑아진다.

    "큰 산을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산마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순수하며 이것은 삶의 태도에 나타납니다."

    매년 그는 머리핀과 사탕을 히말라야 산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고 한다.

    머리핀은 머리에 이가 많은 산마을 사람들의 위생을 위해서다. 머리핀으로 머리를 묶다보면 자연스럽게 머리를 한번이라도 더 다듬게 돼 이가 줄어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탕은 짐을 많이 지고 산길을 다니는 산마을 사람들에게 혈당을 보충해주기 위해 매년 한짐을 가지고 간다.

    산을 오르며 재밌는 일도 많지만 안타까운 일도 많았단다.  의료혜택과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된 산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다.

    지난해 그는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중이염이 몸속 깊숙이 퍼진 나무꾼을 만났다.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했더라면 별 탈 없을 병 때문에 힘겨워하며 나무를  지고가는 나무꾼의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맺혀 있단다.

    원주민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올 초에 시작한 게 낭기마을계다.

    100여명의 지인들과 낭기마을계를 만들어 회원들이 매달 1만 원씩 내 모은 성금을 네팔 중서부 히말라야 산기슭의 낭기 마을(해발 2천300m)에 전달하고 있다.

    낭기마을에서는 이 돈으로 집도 짓고 나무를 심으며 아이들을 위해서는  교재와 책을 산다고 한다.

    그는 히말라야의 산행을 통해 일상의 생활이 여유로와 졌단다. 모든 사물과  구도자, 산악인들을 포용하는 히말라야의 기운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이젠 예전에 알던 사람들 모임에서 주로 나오는 재테크, 골프, 자녀 유학에  대한 화제가 어색하다.

    나이가 50줄에 들어섰음에도 그의 히말라야에 대한 열정은 좀처럼 식지 않는다.

    지난달 지리산에서 하산 도중 왼쪽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는  퇴원한 뒤 왼쪽 다리 근육 운동을 하려 한다. 내년 봄 다시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서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히말라야에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산으로부터 얻는 것이 행복입니다."

코멘트(0)     트랙백(6194)